박지은, 시작과 끝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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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우리나라 골프 팬들에게 ‘박지은’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알려졌을 때만 하더라도 그에 대한 이미지는 ‘어려움 없는 환경에서 자란 골프 유망주’ 정도였다. 사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그레이스 박’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여자 골프를 이끌어갈 차세대 스타’에 거론될 정도의 유명세와 영향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골프의 명문이라 불리는 애리조나주립대학교까지 진학했으며 ‘그레이스’라는 친근한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당연히 미국 골프 팬들은 그를 미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프로 데뷔 이후 그의 이름 앞에 붙은 태극기를 보고 ‘또 한국인이었어?’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실망한 이들이 생기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지은은 박세리, 김미현과 더불어 미국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1세대 대한민국 국적의 골퍼 중 한 명이다. 그가 은퇴한 2012년까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만 메이저 대회 1승을 포함해 6승을 거둔 스타플레이어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골프 해설가로 변신해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의 과거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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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은 내 골프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였다. 그때 나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고 전통 있는 애리조나주립대학교의 골프 팀 멤버였다. 그해 열린 NCAA(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 웨스트리저널챔피언십 단체전과 개인전을 우승했다. 또 미국의 아마추어 3대 메이저 대회(US여자아마추어선수권대회, 여자웨스턴아마추어선수권대회, 여자트랜스내셔널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그건 1938년 패티 버그(Patty Berg)가 3대 메이저를 석권한 이후 60년 만의 일이었다.


나는 그때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생각이 들면 그 대회에서 여지없이 우승할 수 있었다.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한 이유도 있지만 그건 자신감이었다. 준비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충분하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92년에 미국에 건너간 이후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그야말로 ‘골프 기계’였다. 그건 또 다른 의미로 골프만 할 줄 아는 아이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혼자 외국에서 타지 생활을 하며 또래 친구들이 겪는 사춘기를 뛰어넘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 아시아인은 나 혼자였다. 따돌림까지는 아니었지만 존재감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골프에 더 몰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악착같이 골프에 집중했고 나중에는 학교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점점 늘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헝그리 정신’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유형의 ‘헝그리 정신’이 있었다. 그레이스 박이라는 사람을 알리는 데 배고픔을 느꼈다. 학교에서 내 이름을 알고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또 그들이 “내 친구 그레이스 박이야”라며 누군가에게 소개해주는 게 더 좋았다. 골프 선수가 아닌 평범한 친구로 대해주는 게 편했다.


대학 생활은 내게 신세계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마음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도 처음으로 사귀었다. 공부도 나름 잘했고 골프는 코치가 나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대회를 앞두고 연습할 때는 최대한 집중해서 하고 그 외에는 개인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었다. 아주 평범한 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1998년과 1999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해였다. 삶의 밸런스가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1998년은 ‘(박)세리의 해’이기도 하다. 세리 언니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도 그 대회의 출전 자격이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결론적으로는 출전하지 못했다. 아마추어 시절 나보다 성적이 훨씬 좋지 않던 제니 추아시리폰 이 세리 언니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만약 그때 내가 출전했더라면 그 결과가 어땠을까? 언니와 내가 연장전에서 맞붙었다면 과연 누가 우승했을까?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방학 때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공항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조그마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LPGA 2부투어인 퓨처스투어(지금의 시메트라투어)에서 상금 랭킹 3위까지는 퀄리파잉 스쿨(시드 순위전) 없이 이듬해 1부투어 전 경기 출전권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나와 상관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무심코 넘겼다. 한국에 들어온 나에게 아버지는 프로 전향을 권유했다. 아버지는 “어차피 LPGA투어가 네 목표고 더는 위로 올라갈 곳이 없으니 큰 무대로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막상 프로 전향을 결심하고 퀄리파잉스쿨을 준비하려니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다. 공항에서 읽은 기사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경험 삼아 나가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퓨처스투어 상반기 대회는 모두 끝난 상황이었고 남은 열 개 대회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과적으로 열 개 대회 중 다섯 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상금 랭킹 1위에 오르며 이듬해 시드권을 확보했다. 미국 언론은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주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LPGA는 당시 내부적인 문제를 겪으며 대회 스폰서도 많이 떨어져 나간 상황이었다. 내가 루키로 데뷔하던 2000년에는 LPGA투어를 키우기 위해 스타플레이어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한창 조성되고 있었다.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하고 2부투어 우승 확률 50%로 프로에 데뷔하는 ‘그레이스 박’이라는 선수는 그들에게 최고의 이슈 메이커였고 투어 분위기를 일순간 반전시킬 수 있는 매개로 사용하기에 적당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나는 모든 언론이 주목하는 가운데 프로 데뷔를 했다. 하지만 그런 과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싫었다. 프로 데뷔 이전까지 대학 생활 자체를 즐기며 아주 평범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 프로 데뷔를 한 것이 내게는 큰 문제였다. 누군가가 내 행복을 뺏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프로 골퍼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대한 부분이었다.


프로 데뷔 첫 대회부터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결과는 리더보드 끝에서 내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다. 공동 76위였다. 이후 열 개 대회에서 네 번이나 컷 탈락했다. 데뷔 후 3~4개월은 그렇게 정신없이 흘러갔다. 무언가가 나를 강력한 힘으로 끌고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그때는 ‘멘붕’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내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던 건 6월에 열린 캐시아일랜드그린스닷컴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하면서부터였다. 뭐, 그 이후에도 성적에 기복은 좀 있었지만 나름 컨디션은 좋았다. 한창 상금 랭킹 5위권까지 치고 올라가던 때였다. 사실 지금에야 밝히는 거지만 자이언트이글클래식에서 당한 갈비뼈 부상은 연습하다가 다친 것이 아니다(대부분의 언론이 그렇게 쓴 걸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허리가 좋지 않아 투어 밴에 있는 치료사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그 치료사는 허리뼈를 맞추기 위해 힘껏 압력을 가해 눌렀다. 일어나서 걸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내 5번 갈비뼈에 금이 심하게 가고 말았다.


내 성적은 계속 곤두박질쳤다. 결국 상금 랭킹 19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해 신인상도 받을 수 없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내가 부상을 당한 자이언트이글클래식에서 우승한 미국의 도로시 델라신이 신인상까지 받았다. 1998년 박세리, 1999년 김미현에 이어 2000년에는 한국인으로서 내가 3년 연속 신인상을 노리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갈비뼈 부상은 나는 물론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1승씩 거둔 것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이었다. 2003년에 안니카 소렌스탐과 세리 언니에 이어 상금 랭킹 3위로 시즌을 마쳤을 때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동계 훈련에 집중했고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연습했다. 이듬해 나는 랜초미라지 미션힐스컨트리클럽 18번홀 그린 옆에 있는 ‘숙녀의 연못’에 뛰어들 수 있었다.


크래프트나비스코챔피언십은 내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 대회 우승이었다. 한때 골프에 미쳐 살던 그레이스 박을 설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대회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그리고 그해 열린 CJ나인브릿지클래식에서 LPGA투어 마지막 우승컵을 챙겼다.


미셸 위를 비롯한 어린 선수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나는 늘 LPGA투어를 대표하는 선수로 거론되곤 했다. 타이거 우즈와 필 미컬슨 그리고 안니카 소렌스탐과 나는 비슷한 시기에 골프다이제스트의 플레잉 에디터로 활동했다. 골프다이제스트는 항상 당대 최고의 선수들만 섭외해 레슨 촬영을 진행하는 영향력 있는 매체였다. 물론 지금도 변함은 없지만. 그건 내가 골프 선수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기준이기도 했다.


골프장에서만큼은 가장 화려해지고 싶었다. 드라이버 샷도 가장 멀리 보내야 하고 퍼트도 가장 잘해야 하고 특히 필드에서는 누구보다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화려하고 튀는 의상을 즐겨 입은 이유다. 하지만 골프장이 아닌 곳에서 주목받는 건 싫었다. 일하는 곳과 생활하는 곳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프로 골퍼로서 당연한 일이고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나중에 깨닫게 됐다.


2004년에 상금 랭킹 2위로 시즌을 마쳤을 때는 딱 한 계단만 더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2005년에 참가한 두 번째 대회가 멕시코에서 열린 마스터카드클래식이었다. 허리가 심하게 아팠지만 참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플레이했다.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크래프트나비스코챔피언십도 참가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못 내린 결정이었다.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무리해서 대회 스케줄을 소화했다.


허리 통증이라는 게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만 골프 클럽만 잡으면 테이크백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냥 아파도 조금 참고 플레이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무리하면서 스스로 골프 선수 생활을 단축시켰다. 2006년에는 시즌을 거의 접다시피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신적으로도 아주 힘들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고관절 수술에 이은 허리 수술까지 받았다. 비거리는 제 거리를 찾았고 충분한 재활 운동으로 허리도 많이 좋아졌다. 다시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2012년의 일이다. 2주간의 휴식을 마치고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데 갑자기 비행기 타는 게 싫었다. 성격상 짐도 미리 완벽하게 챙겨놓는 스타일인데 옷가지를 가방에 넣는 것도 귀찮았다. 또 대회장에서 연습 라운드를 하러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제 은퇴할 때가 됐나?’


평소 가깝게 지내던 베스 대니얼과 멕 맬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내가 ‘엄마’라고 부르며 의지하던 전설들이다. 호텔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 기분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그러자 그들이 동일하게 해준 말이 있다. 그것은 “때가 되면 네가 알 거야. 주변에서 아무리 뭐라고 해도 때가 되면 너 스스로 알게 될 거야”라는 말이었다. 그들이 말한 “Only You Know”라는 세 단어가 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그다음 주 은퇴를 했다.


은퇴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데까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방 안에서 하염없이 울다가 결정한 일이다. 그게 아직도 어떤 감정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까지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20년 넘게 나와 함께한 것이 골프였으니까 당연히 서운함과 아쉬운 감정이 뒤섞여 겉으로 분출된 것이겠지만 ‘끝’이라는 단어가 내 안에 무언가를 건드렸던 것 같다.


나는 캐디와 친한 선수 몇 명에게만 은퇴 사실을 알리고 협회나 언론에는 알리지 않을 계획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메이저 대회인 웨그먼스챔피언십이 내 마지막 무대였다. 내 캐디인 루이 파올리니(Louie Paolini)가 “넌 그래도 그레이스 박이잖아”라고 하면서 은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나는 썩 내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미디어 센터에 있는 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협회 직원들과 기자들이 모두 코스로 쏟아져 나왔다.


대회 2라운드 13번홀을 막 마쳤을 때 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다섯 홀에서는 선수 생활을 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면서 플레이했다.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들은 나에게 진심 어린 박수와 환호를 보내줬다. 눈물이 계속 흘러나와 오히려 플레이에 방해가 될 지경이었지만 골프 선수로서 누려본 최고의 호사였다. 물론 그들은 내가 컷 탈락할 것으로 생각하고 한 행동이었지만 나는 이틀을 더 플레이했다.


미디어 센터에서 은퇴 공식 기자회견이 끝나자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모두 기립 박수를 치며 내가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한국에서 온 기자들은 내 마지막 순간을 기사로 다루느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미국의 한 언론사 기자는 나와 인터뷰하는 내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만약 내가 기어이 은퇴 사실을 알리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아마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하고 투어를 떠난 첫 번째 한국 선수가 됐다.


나는 은퇴 이후의 삶이 어느 정도 정해진 상황이었다. 그건 바로 결혼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어려움 없이 은퇴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최근 5년은 내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다. 큰 욕심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보고 싶은 게 꿈이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으며 삶을 살았던 터라 지금의 생활이 아주 만족스럽다.


지난해 가을에는 은퇴한 선수들끼리 소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엘사’라는 모임이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엘피지에이(LPGA)를 사랑하는 은퇴한 선수들의 모임’이다. 한희원, 장정, 김주연 그리고 내가 모여 만든 모임이다. 예전에는 필드에서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고 또 은퇴한 이후에는 각자의 생활이 바빠 어울리지 못하던 사이였지만 이제는 그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반가운 동료들이다. 점차 모임의 규모도 늘리고 재능 기부와 같은 좋은 일도 할 수 있으면 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골프다이제스트코리아의 창간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어떻게 보면 골프다이제스트가 LPGA투어 진출 1세대와 함께 성장해온 것 같아 애정이 남다르다. 그동안 우리 선수들의 솔직한 모습을 가감 없이 독자 여러분에게 전달해준 점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앞으로도 골프 업계 리딩 매거진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언제나 응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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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은
나이 39세
신장 167cm
우승 6승(캐시아일랜드그린스닷컴클래식, 디오피스디포, 시스코월드레이디스매치플레이챔피언십, 미켈롭라이트오픈, 크래프트나비스코챔피언십, CJ나인브릿지클래식)
수상 LPGA 베어트로피(2004년)
현재 SBS골프 해설위원

[골프다이제스트 고형승 기자  tom@golfdigest.co.kr]

사진=전성환

기사제공 골프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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