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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1996 [Feature: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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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골프다이제스트 DB, KPGA, KLPGA 제공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종영했다. 세 번의 응답하라 시리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며 80년대 후반에 즐겨 듣던 대중가요와 패션, 심지어 유행어까지 히트시키는 등 명실상부 복고 열풍의 주역이 됐다. 골프다이제스트 편집부도 1988년의 골프를 조명해볼까 고민하다가 거듭된 회의 끝에 정확하게 20년 전인 1996년으로 시간을 돌리는데 합의했다. 왜냐고? 솔직히 1988년을 회상하기엔 우리가 너무나 젊다. 글_GD 편집부

1996년은 문민정부(김영삼 전 대통령)가 들어선 지 4년이 되던 해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했던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한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통신위성 무궁화 2호를 발사했고 영국 에든버러의 로슬린 연구소에서는 아기 양 ‘돌리’가 세계 최초로 체세포 복제에 의해 태어났다. 문화 대통령이라 불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돌연 은퇴를 선언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아이돌 그룹 H.O.T가 ‘전사의 후예’로 데뷔했다. 박찬호는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승리 투수가 됐다. 하계 올림픽이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렸고 우리나라는 종합 10위에 올랐다. 뜨거웠던 여름, 한총련을 비롯한 2만여 명의 대학생이 연세대학교를 점거한 채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같은 달 8월, 서울지방법원이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반란과 내란 수괴죄 등을 적용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영국에서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가 이혼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미국의 대통령 빌 클린턴은 재선에 성공했다. 그럼 1996년 골프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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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은 한국 골프 역사에 더없이 중요한 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남녀프로골프투어에 세대교체가 활발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최경주와 강욱순, 박세리와 김미현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이들이 대거 등장해 활약하던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대 투어를 주관하는 협회의 행정은 당시에도 언론의 뭇매를 맞기에 바빴다. 글_고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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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6년 나란히 상금 랭킹 1위에 올랐던 박세리와 최경주.

2 경주조선컨트리 클럽에서 62타로 국내 18홀 최소타 기록을 세운 최상호.

3 당시 스물세 살이던 서아람의 풋풋한 모습.

4 (왼쪽부터) 한화컵서울여자 오픈에서 우승한 박세리와 2위 정일미, 3위 김미현.

5 (왼쪽부터) 아스트라PGA 선수권에서 2위에 오른 최광수, 우승자 신용진, 3위의 박남신.

6 대우자동차컵 매일여자오픈 우승자 박현순.

7 팬텀오픈에서 프로 데뷔 5년 만에 첫 우승을 차지한 임형수.

8 아시안투어 상금 랭킹 1위에 오른 강욱순.

 

1996년 한국프로골프투어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혼전이었다. 열한 개 대회에서 모두 다른 우승자가 배출됐다.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최경주는 엘로드배한국오픈을 우승하며 상금 랭킹 1위에 올랐다. 그는 열한 개 대회 중 단 두 개 대회만 제외하고 모두 톱10에 들었는데 그중 한 번이 우승, 네 번이 2위의 성적이었다. 아시안투어에서는 강욱순이 상금 랭킹 1위에 오르며 한국 골프의 위상을 높였다.

프로 3년째였던 최경주의 성장과 강욱순의 아시아 정복은 그때까지 이어져온 최상호와 박남신의 양강 구도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할 만큼 파워풀했다. 여기에 신한오픈에서 우승한 정준의 가세로 세대교체의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우승자 열한 명의 평균 연령은 34세였고 최고령 우승자는 41세의 최상호와 김영일이었다.

강욱순은 최경주를 가리켜 ‘애늙은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힘을 억제하면서 컨트롤 샷을 구사할 때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면서 “서른도 되지 않은 청년이 마치 애늙은이처럼 자제력을 갖고 플레이에 임한다”고 놀라워했다. 물론 지금의 최경주에게 애늙은이라는 호칭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때만 해도 슬림한 체형의 혈기 왕성한 20대였으니까.

최경주는 슈페리어와 2000만원에 후원 계약을 맺었다. 최상호가 코오롱 엘로드와 4200만원에, 김종덕이 아스트라와 4000만원에 계약을 맺었고 여자 선수 중 루키였던 서아람이 역시 아스트라와 2000만원에 계약했다. 금액만 놓고 봤을 때는 최경주의 무게감에 비해 상당히 낮은 액수로 계약을 맺은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2년후인 1998년에는 슈페리어와 7000만원에 재계약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에서는 열아홉 살의 박세리와 김미현이 프로 무대에 등장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열네 개 대회 중 절반인 일곱 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미 아마추어 신분이었던 1995년에도 박세리와 김미현은 각각 4승과 1승을 거두며 스타 탄생을 알렸다. 1996년 4월, 용인프라자컨트리클럽에서 열린 KLPGA제1차프로테스트에 이들은 나란히 참가했고 박세리는 3라운드 합계 이븐파 216타를 기록하면서 1위에 올랐다. 국내 최연소 여자 프로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김미현은 4오버파 220타를 기록하며 3위로 통과했다.

시즌 초반만 해도 김미현과 박현순이 각각 2승씩 거뒀고 서아람, 이영미 등이 우승하면서 혼전이었지만 박세리가 시즌 중반부터 치고 나가면서 독주의 모양새를 갖췄다. 결국 박세리는 상금 2억4268만9090원을 획득하며 국내 남녀프로골프 역사상 최다 상금액(기존 기록은 최상호의 2억1900만원이었다)을 기록했다. 김미현은 프로 데뷔 후 2개월 19일 만에 미도파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며 최단 기간 우승기록을 세웠다. 그녀는 1억5419만3678원을 벌어들이며 상금 랭킹 2위에 올랐다. 박세리와 김미현 19세 듀오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대회마다 수많은 갤러리를 몰고 다녔다.

이들과 더불어 또 한 명의 주목할 만한 선수가 등장했는데 바로 아마추어 강수연이었다. 국가대표 출신이자 경희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강수연은 제일모직로즈여자오픈에서 합계 8언더파 208타로 우승을 차지했다. 박세리는 아쉽게 2위에 머물렀고 김미현 역시 공동 3위에 만족해야 했다. 대회에 참가했던 호주의 카리 웹은 2라운드 종료 후 스코어 카드에 사인을 하지 않아 실격 처리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95년 삼성물산은 박세리와 후원 계약을 맺었다. 10년간 계약금 8억원, 연봉 1억원에 맺은 초고가 계약이었다. 여기에 미국 진출 시 체재비와 훈련비, 강습비는 별도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땅콩’ 김미현은 무적 선수로 한 해를 보내다가 연말에 국제상사 프로메이트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연간 1억원의 계약금과 공식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우승 상금의 100%를 현금으로 받는 조건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정식 계약을 맺은 여자 선수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코오롱엘로드, 반도스포츠, 아스트라, 휠라 정도만 여자 선수와 정식 계약을 맺었고 그 외에는 의류나 볼 지원 정도에 그쳤다. 요즘 투어에서 활동 중인 여자 선수 중 70~80% 이상이 후원 계약을 맺고 있음을 비춰보면 그때는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박세리는 이후 미국으로 진출해 25승을 거두고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세리 키즈’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박인비, 신지애, 이보미, 유소연, 최나연 등과 같은 차세대 유망주들의 롤모델이 됐다. 그리고 그 세리 키즈는 또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어 아직도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타이거 우즈의 등장4

세계 골프의 판을 뒤흔든 타이거 우즈가 스탠퍼드대 2학년 재학 시절이었던 1996년, 프로로 전격 전향했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미국 주니어아마추어선수권과 아마추어선수권을 각각 3연패 하며 제2의 잭 니클라우스라고 불리던 우즈였기에 그의 프로 데뷔는 전 세계인의 관심사였다. 그는 끈질긴 프로 전향 제안을 받아왔지만 대학 졸업 후 데뷔해도 늦지 않다며 미뤄오던 터였다. 우즈는 나이키와 5년간 400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으며 골프용품 업체인 타이틀리스트와도 300만 달러에 계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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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천재 박세리와 세계 정상 소렌스탐의 만남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대회인 삼성월드챔피언십이 일동레이크컨트리클럽에서 10월17일부터 나흘간 열렸다. 총상금 50만 달러(우승 상금 : 12만5000달러) 규모의 대회였다. 이 대회가 관심을 끈 이유는 LPGA투어에서 1994년 신인상을 받고 이듬해인 1995년에 3승을 거둬 상금 랭킹 1위에 오른 스웨덴 출신의 안니카 소렌스탐이 출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에서 박세리, 김미현 등 실력 있는 신예 골퍼들이 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국내 언론과 팬들은 박세리가 세계적인 무대에서도 통할 것인지에 온 관심이 쏠렸다. 일단 뚜껑을 열어보니 대회 2라운드에서 공동 선두, 3라운드에서 1타 차 2위에 오르며 보는 이들의 기대에 한껏 부응하는 성적을 냈다. 박세리는 11언더파를 기록하며 소렌스탐, 알프레드손(스웨덴)에 이어 3위에 올랐다.

비록 3위라는 성적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건 시사하는 바가 상당했다. 대회의 출전 선수가 LPGA투어 상금 랭킹 18위 이내,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 상금 랭킹 1위의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었기에 그렇다. 당시 미국 진출을 구상하고 있던 박세리에게 3위라는 성적은 ‘합격점’이었다.

하지만 몇 개 홀에서 실수하는 등 결정적인 실수를 하면서 ‘위기관리 능력의 부재’라는 숙제를 안았던 대회이기도 하다. 드라이버 샷은 소렌스탐보다 약 30야드 정도 더 나갔지만 잦은 미스 퍼트와 숏게임 능력의 차이로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다. 안니카 소렌스탐은 4라운드 합계 14언더파 274타를 기록하며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이후 미국LPGA투어에서 자웅을 겨뤘던 이들 둘 간의 첫 맞대결은 이렇게 끝이 났다. 당시 스물여섯 살의 소렌스탐이 열아홉 살에 불과했던 박세리가 자신을 위협할 무서운 존재로 성장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까? 아마도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기 전까지는 아니었을 거라는 게 에디터의 생각이다.

박세리는 박인비, 신지애, 이보미, 유소연, 최나연 등과 같은 차세대 유망주들의 롤모델이 됐다. 그리고 그 세리 키즈는 또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어 아직도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1996년 최종 상금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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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의 첫 번째 눈물

7월에 열렸던 대우자동차컵매일여자오픈에서 박현순과 루키 박세리는 서든데스 플레이오프 방식의 연장전을 가졌다. 공주금성여고 선후배 간의 맞대결이었다. 대회 마지막 날, 전날까지 선두였던 박세리(-5)와 2타 차의 박현순은 같은 조에서 플레이했다. 최종 라운드 내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16번홀에서 박현순이 2타 차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17번홀에서 박현순이 보기를 범하고 박세리는 버디를 잡아내면서 마지막 홀을 남겨놓고 두 선수는 동타를 이뤘다. 18번홀에서 두 선수는 모두 보기를 기록하며 승부는 연장으로 들어갔다. 연장 두 번째 홀. 박현순이 10m짜리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면서 감격스러운 우승을 차지했다. 프로 데뷔 후 첫 우승을 노렸던 박세리로서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10대 소녀에게는 아마도 프로의 높은 문턱을 실감했던 순간이었으리라. 결국 박세리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녀가 우리나라 골프계를 이끌어갈 큰 재목이었기에 그 눈물은 보는 이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1996년 KPGA투어 일정 및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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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KLPGA투어 일정 및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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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1990년대 중반 이슈 몰이를 했던 추억의 패션을 소환한다. 그런데 이게 웬열? 20년 전에도 현재의 트렌드가 존재하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불어 열아홉 살 김미현의 힙합 패션은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 신예 박세리, 스물여섯 살의 최경주 등 스타플레이어의 스타일을 통해 골프 패션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글_인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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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골프다이제스트 DB, KLPGA 제공

1. 김미현은 낙낙한 반팔 폴로 티셔츠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투 턱 반바지로 코디했다. 루스 삭스와 곱창밴드로 포인트를 줬다.

2. 납작한 챙의 모자와 산뜻한 컬러를 가미한 장갑으로 포인트를 준 김미현.

3. 박세리는 상•하의를 단정하게 매치했다. 넉넉한 반바지의 품이 특징.

4. 20대 중반의 정일미는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나 반바지를 매치해 여성스러움을 강조했다. 정일미 역시 루스 삭스를 즐겨 신었다.

5. 24세의 서아람은 당시 무채색 계열의 코디를 통해 자신의 깨끗한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6. 상금순위 3위였던 최상호는 플라워 패턴의 상의를 코디해 복고 패션을 완성했다.

 

힙합과 복고 패션이 공존하다

<응답하라 1997>을 시작해 1994를 거쳐 최근 종영한 <응답하라 1988>에서는 매번 당시의 패션은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는 주인공 덕선이가 배바지에 청청 패션을 선보이며 패션업계에 복고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예스러운 패션을 통해 “그때는 그랬지”라고 회상하며 쉽게 향수에 젖는다. 그렇다면 1996년의 패션은 어떠했을까?

당시 강남은 헐렁헐렁 늘어지는 힙합 패션이, 강북은 촌스러운 복고 패션이 유행했다. 힙합 패션은 루스한 핏이 특징이다. 거리의 먼지를 쓸고 다니는 일명 똥 싼 바지, 길게 늘어뜨린 벨트, 헐렁한 박스 티에 체크 남방, 커다란 신발은 서로 묘하게 어울렸다. 복고 패션은 무릎길이의 스커트, 꽃무늬 티셔츠에 꼭 끼는 재킷, 보글보글한 폭탄 머리가 포인트다.

이러한 유행은 골프 패션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물론 골프웨어는 젠틀맨십의 기본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일반 패션처럼 디자인이 과한 편은 아니다.

우선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샛별로 불리던 19세 김미현의 스타일을 살펴보자. 당시 김미현은 힙합 패션을 선호했다. 그녀는 소매가 팔꿈치 아래까지 내려오는 낙낙한 반팔 폴로 티셔츠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투 턱(Two Tuck) 면 반바지를 매치했다. 액세서리는 루스 삭스(Loose Socks)와 곱창밴드를 사용해 포인트를 줬다. 루스 삭스는 종아리 부분이 헐렁한 무릎까지 오는 양말을 일컬으며, 발목이 가늘어 보이는 효과를 준다. 곱창밴드는 90년대 소녀들의 ‘잇 아이템’으로 손꼽힌다.

26세였던 정일미 역시 무릎길이의 스커트와 루스 삭스를 발목 위까지 올려 신고 여성미를 강조했다. 발목 양말이나 니삭스를 매치하는 요즘 골퍼와 상반되는 스타일이다. 반면 박세리, 서아람 등은 화이트, 네이비, 베이지 컬러 등 무채색 컬러로 단정한 코디를 선호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품이 넓고 허리선에 주름이 있는 면바지가 골퍼의 교복이었다. 남자 골퍼뿐만 아니라 여자 골퍼도 투 턱의 배바지를 즐겨 입었다.

1996년 주요 패션 브랜드는 다음과 같다. 코오롱 엘로드, 잭니클라우스, 슈페리어, 아놀드파마, 닥스골프, 라우라, 팬텀, 크로스 크릭(Cross Creek) 등이 골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엘로드, 아스트라, 슈페리어는 선수를 후원했다. 아스트라는 김종덕, 허석호, 서아람, 김미현을 영입했고 코오롱 엘로드는 최상호, 강욱순, 송채은 등을 지원했다. 그 외에 슈페리어는 최경주를, 휠라는 정일미와 김영을 후원하며 골프 패션 산업의 성장을 이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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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강조되는 트렌드 골프마인드웨어

2000년대 중반부터 신흥 골프 브랜드인 르꼬끄골프, 푸마골프, 파리게이츠가 순차적으로 론칭하며 골프웨어와 라이프스타일 웨어의 경계가 무너졌다. 대다수의 골프웨어 브랜드는 과거부터 캐주얼룩 골프웨어, 라이프스타일 웨어, 데이웨어, 타운웨어라는 수식어를 강조하며 트렌드를 이어갔다.

20년 전에도 패션 전문가들은 골프웨어는 라이프스타일 웨어로 접근했다. 디자이너들은 캐주얼룩 골프웨어를 ‘골프마인드웨어’라 칭했다. 1990년대 초반 30~40대 여성을 중심으로 골프웨어를 간편한 외출복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당초 골프웨어는 골프를 할 때만 입는 전문 스포츠 의류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올림픽이 열린 1988년부터 여가 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드러워지면서 여성용 골프웨어의 수요가 증가했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일부 계층에서 골프를 즐기는 여성이 늘어남에 따라 골프용으로 만들어진 옷이 여성 캐주얼웨어의 품목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골프웨어는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외출복으로 애용됐다. 특히 비골퍼에게도 제2의 캐주얼룩으로 떠올랐다. 골프웨어가 주는 편안함과 함께 고급 스포츠인 골프에 대한 호감 때문이다. 이때부터 골프웨어는 골프용(Do Golf)과 골프 전후용(Before, After Golf)로 나누어 구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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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강조되는 트렌드 폴로 티셔츠로 레이어드 코디

골프는 격식을 중시하는 운동으로 칼라가 있는 티셔츠를 입어야 한다. 따라서 폴로셔츠는 골퍼의 기본 복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폴로 티셔츠는 남녀는 물론 나이에도 상관없이 즐겨 입을 수 있어 라이프 웨어에서도 인기템으로 꼽혔다. 서울 명동이나 이대 앞, 압구정동의 보세 가게에서는 갖가지 색깔의 반소매와 소매가 없는 폴로 티셔츠가 등장해 많이 팔려나갔다. 그중 중년 여성들은 기본형의 폴로 티셔츠를 골프웨어로 입기도 했다.

각기 다른 컬러의 폴로 티셔츠 두 장을 레이어트해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칼라 깃을 세워 두 가지 색이 잘 보이도록 입는 것이 포인트다.

좀 더 튀고 싶다면 긴팔의 폴로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짧은 반소매를 덧입는 레이어드 룩을 강조하기도 했다. 휠라 소속이었던 김영은 세로 스트라이프 패턴의 긴팔 폴로셔츠 안에 목폴라 티셔츠를 레이어드해 스타일을 살리고 보온성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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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컬러와 클래식한 디자인의 골프화 인기

국내에 선보였던 골프화는 수입품, 국산품, 라이선스 제품을 포함해 25여 종이었다. 그중 고려레포츠의 마스터즈, 에버그린, 그린윙, 대진제화의 잔디로는 국내 시장을 주도한 빅4 브랜드로 손꼽혔다. 디자인은 클래식하고 중후한 느낌으로 주로 블랙, 레드, 카키, 브라운 컬러를 사용했다.

국내에 수입된 골프화는 한국인의 발 모양 스펙에 맞췄다고는 하나 대부분 일본인을 기준으로 한 제품이었다. 일반적으로 국산 제품은 여성용은 450g(한쪽의 무게), 남성용은 550~600g이 주류를 이뤘고 내구성을 보완해 경량화한 450g 제품도 선보였다.

일반 드레스화처럼 규격화(공업진흥청이 제정한)된 제품이 거의 없고 업체마다 사이즈가 달랐다. 그나마 발 길이(mm 단위로 된)만 기준으로 사이즈가 표시되어 있었다. 자신의 체형에 맞는 골프화를 고르기 위해서는 볼의 넓이와 발 등의 높이도 고려해 선택해야 구매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골프화 시장 규모는 연간 300억~500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업체들이 차지한 점유율은 60~65%로 높았다. 한때 70%까지 점유율을 보이기도 했지만 2년간 외제 공세에 밀려 시장을 잠식당한 것. 국산품은 5만~15만원대의 중저가를 형성하고 외제는 20만원에서 최고 45만원까지 판매됐다. 당시 외제인 풋조이 드라이조이가 16만5000원대였다.
◀당시 서른여덟 살의 문필선. 1990년대 유행했던 태슬 장식으로 포인트를 준 골프화를 착용했다. 스트라이프 패턴의 베스트와 헌팅캡을 착용한 클래식한 코디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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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서 실례~실례~합니다!

초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안신애와 양수진이 1996년도의 골퍼와 마주한다면? 그녀들은 가장 먼저 “실례~실례~합니다!”를 외쳐야 할 것이다. 33cm까지 짧아진 스커트, 가슴과 허리 라인이 드러나는 슬림 핏 티셔츠, 힙합 전사들이 착용하는 스냅백은 1996년의 골퍼에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 골프웨어는 디테일에 큰 변화를 거쳤다.

상의와 하의는 전체적으로 타이트해졌다. 상의는 풀스윙했을 때 배꼽이 살짝 드러날 정도로 길이가 짧아졌고 허리선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바지는 턱(Tuck)이 없는 디자인이 대부분이다. 힙 선을 덮는 미디 길이도 짧아졌다. 여성 팬츠의 경우 몸에 달라붙는 스키니 진 형태가 주를 이룬다. 과거에 투 턱 팬츠를 입던 최경주, 강욱순, 최상호도 최근 슬림형 원 턱 팬츠나 노 턱 팬츠를 즐겨 착용하며 더욱 젊은 감각을 뽐내고 있다.

1996년은 짧은 바지나 치마의 길이는 무릎 중간까지가 주류를 이룬다.

색채와 패턴도 독특해졌다. 과거에는 체크나 꽃무늬 패턴과 화이트, 핑크, 퍼플 등 환하고 깨끗한 색상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화려한 컬러감은 기본이고 기하학적인 패턴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다. 또한 파리게이츠나 와이드앵글은 캐릭터를 추가하며 캐주얼 영 골프 룩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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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아이템이? SKB사의 골프 케이스

르꼬끄골프에서 4년 전 해외 골프 여행을 자주 떠나는 골퍼를 위해 ‘하드 케이스 캐디백’을 내놓은 적이 있다. 하드 케이스 캐디백은 획기적인 아이템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콘셉트의 캐디백이 20년전 아이디어 상품으로 출시된 것을 발견했다.

미국 스포츠 케이스 전문 생산업체인 SKB사의 ‘골프케이스’가 은성무역에 의해 수입•판매되면서 국내 골퍼에게 소개된 것. 여행용 골프백인 골프케이스는 첨단 신소재였던 UHMP로 중량이 가볍고 견고함을 자랑했다. 방습과 방수는 기본. 또한 이동에 편리하도록 케이스 하단 부분에 바퀴를 장착한 점도 눈에 띄었다. 당시 골프 세트를 항공편이나 고속버스로 운반하면서 클럽이 부러지는 사고가 잦아 시비가 야기됐지만 골프케이스가 출시되면서 이러한 승강이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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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0년 전인 1996년, 골프용품 업계를 뜨겁게 달궜던 이슈는 무엇이었을까. 골프용품 업계에서 당시 최고의 정보력을 가진 전문가들이 뽑은 키워드를 3가지로 정리했다. 글_전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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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전, 미안하게도 주입식 교육(?)의 폐해로 넘버원 골프볼은 타이틀리스트 프로 V1이라 인식하고 있는 에디터로서는 현재 8세대까지 출시된 타이틀리스트 프로 V1이 아직 세상에 공개되기도 전인 시절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이는 20년이라는 세월에 대한 현실감을 높이기 위한 발언이었음을 밝힌다. 참고로 당시 프로 V1만큼 인기를 얻은 것은 던롭의 DDH와 윌슨의 스태프라고. 어쨌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내겠다.

1996년 용품 업계 이슈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1996년은 메탈 헤드에서 티타늄 헤드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신두철 에코골프 대표는 1996년을 ‘역동기’라고 표현하며 “드라이버 소재=티타늄’이라는 공식이 받아들여진 때였다”라고 말했다(신 대표는 캘러웨이를 비롯해 클리브랜드, 아담스골프 등 무려 여덟 개 브랜드를 론칭시켜 성공을 거두게 한, 골프계에서는 ‘미다스 손’이라 불린다). 동시에 헤드의 빅 사이즈화가 이뤄졌다. 가벼운 티타늄을 쓰게 됨으로써 헤드 크기를 키울 수 있었다. 둘째, 국산 브랜드의 전성기라고 말할 순 없어도 현재와 비교했을 때 그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 국산 브랜드 중 가장 선전했던 건 엘로드, 반도골프, 나이센, 데이비드 등이다. 셋째, 일본 브랜드의 인기가 높았다. 그중 S야드와 혼마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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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티타늄 전성 시대

드라이버 헤드에 티타늄을 채용했고 티타늄 시대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물론 지금처럼 장타와 정확성(방향성)을 위해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려는 노력은 지칠 줄 몰랐다.

티타늄은 인공위성 항공기 소재로 쓰여온 초경량 합금이다. 가볍고 탄력이 좋은 것이 특징. 이런 소재의 특성이 살아난 티타늄을 채용한 드라이버는 가벼우면서도 긴 비거리와 방향 안정성이 기존 메탈 우드보다 뛰어나다. 티타늄 드라이버가 탄생하면서 동시에 클럽 헤드까지 대형화되기 시작했다. 티타늄이 가벼워 그만큼 클럽 헤드를 크게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헤드가 커지면 스위트스폿 역시 커지게 마련이다. 빗맞아도 방향성 손실이 덜하다는 이야기다. 또 방향성이 좋아지면 거리 손실 역시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안정감이 생기는 것도 대형 헤드의 장점 중 하나다.

신두철 대표는 “캘러웨이에서 1995년 발표한 그레이트 빅버사(G.B.B.)는 처음으로 티타늄 합금을 채용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이버다”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전 세계 드라이버 시장을 석권한 그레이트 빅버사는 헤드 크기가 기존 빅버사에 비해 25% 늘어난 250cc였고, 헤드는 커졌지만 티타늄 소재로 만들어 가볍고 탄성이 강해 비거리로 고민하는 골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외에도 윌슨이 새로 내놓은 인벡스 드라이버도 250cc였고 클리브랜드의 VAS 티탄 드라이버 역시 260cc의 대형 헤드를 장착했다. 요즘 출시되는 드라이버의 헤드 체적이 430cc, 450cc, 460cc인 것에 비하면 이조차도 굉장히 작은 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티타늄의 열풍은 아이언 헤드에도 재현됐다. 토미아머사 같은 경우에는 티타늄 페이스에 그치지 않고 100% 티타늄으로 만든 아이언 제품(TI-100)을 발매, 시장을 정복하려는 모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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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산의 힘
“1996년이 국산 브랜드의 전성기라고까지 할 순 없지만 현재와 비교했을 때 국산 클럽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외제 클럽이 범람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노력 또한 굉장했다.” 핑골프의 강상범 홍보팀 부장(그는 1996년 당시 국산 브랜드인 나이센에서 근무했다)의 말이다.
또 강 부장은 “1996년은 구매력 있는 사람들이 골프에 심취해 있을 때다. 그리고 대중에게 골프라는 스포츠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때다. 당연히 지금처럼 다양한 미국과 일본 브랜드 제품을 접할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클럽 가격이 굉장히 비쌌는데 드라이버 가격이 70만~80만원 선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두 배 이상의 가치 정도 될 것이다. 반면 국산 클럽은 20~30% 저렴했다”라면서 “그때는 정상급 프로 선수들이 국산 골프 클럽으로 정상을 차지하고 상위권을 유지했다. 한마디로 일반 아마추어 골퍼의 클럽 선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라고 국산 브랜드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때 간판스타였던 최상호, 강욱순, 최광수는 코오롱 엘로드 드라이버와 아이언으로 정상을 지켰다. 그리고 가장 선전했던 국산 브랜드로는 엘로드, 반도골프, 나이센, 데이비드 등이 있었다. 강 부장은 “엘로드를 국산 브랜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출발 당시부터 제품 개발 콘셉트를 품질로 잡고 1989년에 자사 브랜드의 첫 제품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엘로드는 샤프트 제작 공정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샤프트 생산 라인을 갖춘 업체는 엘로드가 유일할 정도였다. 1995년 선보인 슈퍼 900은 엘로드의 역작으로, 100% 티타늄 소재인 250cc 대형 헤드에 일본 도레이사의 최첨단 M-50 샤프트를 장착, 비거리와 방향성을 극대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반도골프는 1995년에 출시한 Ti-250으로 국산 클럽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는데, 첫 제품이 나온 후 4개월 만에 300% 이상 생산량이 늘었다고. 나이센은 1995년에 뛰어든 국산 브랜드로 국내 프로들을 통해 성능이 입증된 드라이버와 아이언을 개발해 주목을 받았다. 1996년 9월에 엘로드컵한국오픈 참가 선수를 대상으로 한 사용 클럽 현황 조사에서 국내 프로 선수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아이언으로 조사됐을 정도.
데이비드 역시 국산 클럽 생산에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하우를 가진 국산 클럽 브랜드로서, 티타늄이 헤드 소재로 인기를 구가할 때 두랄루민이라는 신소재를 사용한 맥스파워를 개발해 골퍼들로부터 화제를 모았다. 이 외에 국산 브랜드로 미사일, 랭스필드 등이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국산 골프공을 제조하는 볼빅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다.
3 뭐니뭐니해도, 일제?
1996년에는 일제 선호도가 높았다. 신두철 대표는 1996년을 ‘일본이 우상인 시절’이라고 표현했다. 그 시절, 국내 골퍼에게 큰 인기를 끈 브랜드는 혼마와 S야드.
일본 브랜드가 골퍼들의 사랑을 받은 건 일본산 제품에 대한 국내 골퍼들의 이상 선호도 탓도 있지만 그해 7월1일 실시된 수입 자유화 조치에 따라 이 두 브랜드가 국내에 본격 상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일본에 적용된 수입선 다변화가 풀림에 따라 국내 골프용품 업계가 춘추전국시대를 맞기는 했다.
일제 클럽이 국내 시장에서 어느 수준에 가격이 형성될 것인지가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미제와 일제 시장 쟁탈전이 예상됐고 국산 브랜드도 이들 사이에서 자구책 마련에 고심해야 했다. 실제 그때 가장 인기가 높았던 캘러웨이는 가격 인하를 계획했고, 미제의 덤핑 공세와 일제의 협공 속에서 국산 브랜드도 가격 인하가 불가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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