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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NG FOR ETERNITY [People :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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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존 도미니스(John Dominis), 더라이프픽처컬렉션(The Life Picture Collection), 게티이미지(Getty Images)

THE KING FOR ETERNITY

아널드 파머가 골프계에 남긴 발자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글_톰 캘러핸(Tom Calla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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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돔 푸로어(Dom Furore)

영원한 골프의 왕

그는 강인한 운동선수의 인상이었다.
프로 권투 선수, 미들급. 그는 꽉 닫혀 있던 골프의 창문을 열고 새로운 바람을 들어오게 했다. 컨트리클럽이었던 게임을 번쩍 들어 자신의 어깨에 얹고 사람들에게 가져가 대중적인 스포츠로 만들었다. 그는 크게 이겼고, 크게 패했다. 골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에게는 관심을 가졌다. 골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그는 사랑했다. 오래전 신문에 실린 그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매체에서도 그는 유감없이 매력을 발휘했다. 그는 주말 밤의 데스크에서 가장 많이 오가는 질문의 주제였다. “오늘 파머의 스코어는 어떻게 돼?” 그는 피츠버그 출신이었다. 빌리 콘과 마이크 딧카, 호너스 와그너 그리고 존 유니태스 같은 위대한 선수들처럼. 멜런이나 카네기, 루니 가문, 진 캘리와 데이비드 매컬로 그리고 숀 손턴처럼. 그는 비옥한 초원이었고 드높은 하늘이자 강, 계곡, 그의 아버지인 밀프레드가 대공황 직전까지 얼마 동안 일한 그런 철강소(“무쇠를 녹이는 용광로는 너무 뜨거워서 두려움도 잊게 된단다.”) 같은 존재였다. 밀프리드는 라트로브컨트리클럽에서 그린 관리인 겸 프로로 일했다
(주된 업무는 그린 관리인이었다). 이따금 장난기가 동할 때의 도리스(아널드의 어머니)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를 밀프리드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는 ‘디컨’이었고, ‘데크’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았다. 아널드는 아버지를 ‘패프(Pap)’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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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밥 고멜(Bob Gomel), 타임라이프픽처스(Time Life Pictures), 게티이미지(Getty Images)

아널드는 패프에게서 중요한 것을 많이 배웠는데, 이를테면 클럽의 그립을 쥐는 법과 기품 있게 행동하는 법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남다른 사람으로 키워낸 건 도리스의 영향이었다. 도리스는 스카프처럼 부드럽고 섬세했지만, 정이 많고 타고난 소통의 대가였다. 그녀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사람들도 그녀를 좋아했다. 디컨은 아들에게 항상 더 강인해지라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라고 자극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뭘 하든 친절하게 굴면 언제나 기뻐했다.
그에게 골프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사람은 없었다. 피터 도베라이너(Peter Dobereiner)가 밝혔듯이 아널드는 어느 순간 골프에 빠진 게 아니었다. 그는 유전병처럼 골프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는 세 살 때 플레이를 시작했고 라트로브의 회원이었던 헬렌 프리츠가 5센트를 주며 자신의 드라이버로 도랑을 넘어가는 샷을 해보라고 했던 일곱 살 때 프로가 됐다. 허리에 차고 있던 장난감 권총을 매만진 그는 결승선의 기수나 빙빙 돌아가는 잔디밭의 스프링클러처럼 크게 휘감는 컷 샷을 선보였다. 프리츠 부인의 볼은 낙하산처럼 페어웨이에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 여성 회원의 날마다 그는 부인들의 드라이버 샷을 대신 해주고 5센트를 챙겼다. “그중 일부는 돈을 제때 안 줬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두 번째 사랑은 비행기였다. 기회만 있으면 활주로에 풀이 돋아난 라트로브의 조그만 비행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관제탑도 없고 계기 착륙도 없고 무선 송수신도 없었다. 아널드는 몇 대 안 되는 그곳의 복엽비행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언젠가 와일리 포스트(Wiley Post) 같은 비행기 조종사가 될 날을 꿈꿨다. 그리고 조종사 대기실의 배불뚝이 난로 옆에 앉아 “이런 세상에, 어쩌면 좋아” 같은 탄식이 절로 나오는 조종사들의 모험담을 들었다.
아널드는 웨이크포레스트대학에 진학했지만 오래 다니지 못했다. 골프 팀 동료 한 명이 농구 선수와 함께 댄스파티에 가기 위해 차를 몰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 골퍼는 아널드의 절친한 친구였고 1947년 US오픈에서 우승했던 루(Lew)의 동생인 버드 워샴(Bud Worsham)이었다. 그는 자책에 빠졌는데, 자신이 같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동행했더라면 파티에서 돌아올 때 운전대를 자신이 잡았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상심한 채 겨우 학기를 마친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해안경비대에 입대했다.
그곳에서 3년간 복무하면서 골프 실력을 연마했다. 그다음에는 한동안 클리브랜드에서 페인트 영업을 하며 지냈다. 다시 코스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US아마추어였다. 그는 1954년에 그 대회에서 투자 은행가이자 중년의 백만장자였던 밥 스위니(Bob Sweeny)를 한 홀 차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에 톨리도 외곽에서 열린 오하이오아마추어챔피언십에서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는데, 어느 날 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에 그곳의 연습장에서 혼자 샷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는 잭 니클라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열네 살의 소년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이름은 세기의 라이벌이었던 뎀프시와 터니처럼 떨어지지 않는 관계가 됐다. 물론 뎀프시가 패배하길 바란 사람은 없었다.
1954년 12월에 아널드 파머와 위니프레드 월저는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다. 이듬해 4월에 두 사람은 작은 트레일러를 단 낡고 더러운 포드를 몰고 첫 마스터스에 출전했다. 파머는 공동 10위를 하고 696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위니는 그에게 늘 사랑할 것이며 지구 끝까지라도 함께 가겠지만, 트레일러는 떼어버리자고 말했다.
1958년과 1960년에도 마스터스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아널드 파머라는 명성이 굳건해진 계기는 덴버 인근에서 열린 1960년 US오픈이었다. 역시 근육질인 마이크 수책(Mike Souchak)과 벤 호건의 뒤를 이어 골프계의 정상에 오른 우승 후보 켄 벤투리도 참가했다. “호건은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준 적이 없었다.” 파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단 한 번도.”
수책은 첫 라운드에서 한 타 차로 앞서나갔고, 두 번째 라운드에서는 세 타, 세 번째 라운드에서도 두 타 차를 유지하면서 열네 명의 선수가 뒤를 쫓는 가운데 파머와는 일곱 타 차이가 됐다. 하지만 마지막 라운드에서 체리힐의 파4인 첫 홀(346야드)에서 시도한 파머의 드라이버 샷이 30야드나 더 멀리 날아가면서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트렸다. 그는 결국 65타를 기록하며 당시 스무 살의 아마추어였던 니클라우스에게 두 타 차 승리를 거뒀다. 두 사람의 시대가 막이 올랐다.
한 달 후, 마스터스와 US오픈을 모두 석권한 파머는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열리는 100번째 디오픈챔피언십에 처음으로 도전해봐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현지의 캐디인 팁 앤더슨(Tip Anderson)의 조언을 충실히 따른 그는 호주 선수인 켈 네이글(Kel Nagle)에게 한 타 차로 패했다. 하지만 파머와 앤더슨은 이듬해 여름에 로열버크데일에서 그리고 그다음 해 여름에는 트룬에서 승리를 거뒀다.
1962년에 세 번째 마스터스 타이틀을 차지한 후 라트로브와 가까운 오크몬트에서 열린 US오픈에서는 플레이오프 18홀에서 니클라우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잭의 유명한 집중력은 이곳에서도 예외 없이 발휘되었고 갤러리 속에서 누군가 “실패해라, 이 욕심쟁이야!”라고 외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파머와 니클라우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게리 플레이어는 이른바 ‘빅3’가 되어 한동안 아널드가 모는 비행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날아다녔다. 텍사스주 시그레이브스에서 행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니클라우스와 플레이어는 천장에 닿지 않기 위해 서로를 꽉 붙들어야 했다. 비행기는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게리는 좌석 밑에 들어가 웅크리고 앉았다.” 파머는 말했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 늘 참기 힘든 노릇 아닌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파트너로 지내면서도 파머와 니클라우스는 충돌했다. 마치 신이 니클라우스에게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재능을 주겠다”고 말하고는, 파머에겐 또 이렇게 속삭인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를 더 사랑할 거야.”
“호텔 방에서 벌인 진저에일 싸움이 기억난다.” 파머의 말에 니클라우스가 가세했다. “어느 날 밤에는 테이블 밑으로 서로의 다리를 차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가 그를 발로 찼다. 그도 내 다리를 찼다.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둘 다 엄청난 멍이 들었다.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하곤 했다.” 파머는 PGA투어 62승을 거두고, 1964년에는 네 번째 마스터스 타이틀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걸 끝으로 더는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 사실을 10년 동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장 뇌리에 오래 남은 기억은 올림픽에서 열린 1966년 US오픈에서의 세 번째 플레이오프 패배였다. 일요일 아침까지 빌리 캐스퍼를 세 타 차로 앞섰고, 캐스퍼가 전반에 36타를 기록한 반면 그는 32타를 기록했다. 단 아홉 홀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격차는 일곱 타까지 벌어졌다. 그러다 몽상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파 세이브를 하면 호건의 오픈 기록을 깰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대중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랜초파크에서 네 번 연속 3번 우드 샷으로 OB를 냈어도 그들은 여전히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의 매력을 더해주었다. 그는 언제나 플레이에 온 힘을 쏟았고 대중은 늘 그런 그를 지지했다.
니클라우스와 파머는 1967년에 발투스롤에서 열린 오픈에서 각각 1위와 2위, 1972년에 페블비치에서는 1, 3위를 차지했다. 4라운드에서 한 조가 되어 서로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다른 선수들의 추격을 간과하지 않았다면 메디나에서 열린 1975년 오픈에서도 둘 중 한 사람이 우승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잭이 마지막 세 홀의 보기를 한탄하며 하도 괴로워하니까 보다 못한 아널드가 한마디 던졌다. “그 엉덩이 들고 밖에 나가서 다시 플레이해보지 그래?”
시간이 흐르면서 앙금은 사라졌다. 아널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시니어투어의 트래디션이라는 대회에서 그는 자신의 스윙을 봐달라고 부탁해서 니클라우스를 놀라게 만들었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잭이 말했다. “나한테? 우리가 30년을 함께 플레이했는데, 그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전히 가시는 남아 있다.” 아널드는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걸 그리고 늘 그래왔다는 걸 알고 있다.”
화해의 기간 중에도, 니클라우스의 메모리얼토너먼트에서 파머가 상을 수상했을 때 가시가 또 도드라졌다. 한 캐나다 기자가 캐나다오픈(아널드의 첫 프로 우승이자 주요한 영예 가운데 잭이 유일하게 차지하지 못한)에 다시 출전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니클라우스는 “바버라가 제대로 할 때까지 계속 출전시키겠다고 말했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파머가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물었다. “바버라가 골프에 대해 얘기한 게 맞아?”
그들은 1996년에 오거스타에서 연습 라운드를 다시 함께하기 시작했다. 타이거가 아마추어 자격으로 출전한 마지막 마스터스였던 그해, 세 사람은 수요일 아침에 함께 플레이에 나섰다. 파5인 13번홀에서 우즈의 드라이버 샷이 잘못 맞아 팝업이 되었음에도 페어웨이를 지켰다. 그러자 니클라우스는 타이거를 등지고 섰고, 파머는 그의 어깨너머로 스무 살의 청년이 세컨드 샷을 위해 아이언을 꺼내 드는 걸 보더니 이렇게 속삭였다. “레이업을 하려나 봐.”
“아이고, 아니.” 잭은 다정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야.”
타이거는 힘차게 날아가는 정확한 샷으로 개울을 넘겨 볼을 그린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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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트랜센덴틀그래픽스(Transcendental Graphics), 게티이미지(Getty Images)
*이른바 ‘아니 부대’와 아널드, 60년대 초.

 

 

완벽을 추구하다

“아널드와 내가 모든 걸 완벽하게 한 건 아니다.” 니클라우스는 말했다. “골프에서는 완벽을 추구하더라도 결코 그걸 이룰 수 없다.”
완벽이라는 주제에서 파머는 변함없는 성자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45년 동안 위니를 아꼈지만, 그는 모든 여자를 사랑했고, 적잖은 여자들이 그의 사랑에 응했다. PGA 챔피언인 밥 로스버그(Bob Rosburg)는 넉넉잖은 주머니로 투어에 참가하던 시절에 아널드와 한 방을 쓰곤 했는데, 한번은 유난히 흥분한 한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로스버그는 남자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널드 대신 총을 맞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침대는 창문 쪽이에요.”
2013년에 톰 왓슨은 여든네 살의 파머가 슈퍼모델인 케이트 업턴(Kate Upton)과 함께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을 패러디한 골프다이제스트의 표지에 불만을 토로했다. 파머는 농부의 뚱한 표정을 흉내 내며 건초용 갈퀴 대신 벙커의 고무래를 들고 있었다. “마치 노망든 노인네처럼 보인다”고 왓슨은 말했다. “곁눈질로 케이트를 훔쳐보면서 눈을 빛내는 사진을 찍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아니의 본모습을 잘 잡아낸 사진이 됐을 것이다.”
그는 그해에 공식 석상에서 단 한 번의 스윙도 하지 않고도 4000만 달러를 벌었고, 이듬해에도 다시 4000만 달러를 벌었다. 마지막 해까지 파머가 벌어들인 순수익은 6억8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최초의 슈퍼 스포츠에이전트라는 평가를 받았던 마크 매코맥(Mark McCormack)은 위대한 친구의 위대한 브랜드를 함께 구축했다. 매코맥은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름 성형을 하러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다.
파머는 광고와 건축, 의류, 자동차, 휘발유, 케첩, 세탁용품, 우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욋돈을 벌었다. 심지어 <투나잇 쇼>의 조니 카슨을 대신해 특별 진행을 맡기도 했다. 찰리 매카시(Charlie McCarthy) 이후 가장 어색한 진행이었지만, 방청객들은 좋아했다. 밥 호프가 주연을 맡았던 <콜 미 브와너(Call Me Bwana)>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빙 크로츠비와 페리 코모, 제임스 가너부터 잉글랜드의 왕 자리를 버리고 심프슨 부인의 남편이 된 에드워드와도 교우했다. 대통령과 라운드를 함께한 프로는 많지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생일 축하해요”라고 말한 건 파머뿐이었다.
파머는 베이힐과 라트로브, 이 두 곳을 오가며 지냈다. 노먼 록웰이 그린 그의 초상화는 라트로브에 걸려 있다. 아널드가 라트로브의 집에서 의자만 돌리면 창문 밖으로 유년기의 모습이 다시 펼쳐졌다. 1971년에는 아버지가 근무하면서 회원의 명확한 초대 없이는 라커룸이나 레스토랑, 바에 절대 발을 들이지 않았던 골프 코스를 인수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고개를 넘어 그곳에 가서 꿩과 토끼, 다람쥐를 잡았고, 그걸 근처의 개울에서 씻은 다음 밤새 소금물에 담가두었다. 언덕 끄트머리에 서 있던 늙은 떡갈나무가 쓰러졌을 때 줄기가 바스라지면서 꿀벌들이 자리를 잡았다. “‘잘 봐라, 아니.’ 아버지는 말했다. ‘이제 우리가 저 꿀을 엄마한테 가져다줄 거야. 하지만 5파운드짜리 설탕 두 봉지를 가져와야 해. 꿀을 가져오는 대신 설탕 두 봉지를 넣어줘야 벌들이 먹을 게 있을 테니까.’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때 내 나이가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이었다.”
어쩌면 그는 평생 꿀을 가져가고 그 자리에 설탕을 넣으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4년 5월13일에 그는 매사추세츠주의 한 주니어 골퍼에게 천 번째(어쩌면 만 번째) 편지를 썼다. 그 선수 형의 부탁이었다.
“네이트에게,
너의 형인 애덤에게서 들었는데, 네가 뛰어난 골퍼이자 아주 좋은 동생이라더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톤힐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내가 해줄 조언을 귀담아듣는다면 즐겁고 보람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

✽정중함과 공손함은 시대에 상관없이 지켜야 할 원칙이고, 좋은 매너도 마찬가지란다…

“호건의 행동에 아널드는 큰 상처를 받았다.” 바이런 넬슨은 말했다.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호건은 무리 지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벤에게도 친구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열정이 대단하고, 실력도 뛰어났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다. 자동차 사고 이후, 다시 걷게 된 다음에 최고의 플레이를 선보였을 때 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바이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말을 해야 하는 타이밍을 아는 건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만큼 중요하단다…. 

“파머는 밤에 자러 갈 때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샘 스니드는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카리스마가 더 넘쳤다.”

✽규칙을 준수하며 이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를 생각하면 그의 손이 떠오른다.” 이건 레이먼드 플로이드의 말이다.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손. 그리고 그 눈도. 골프 코스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보지만 실제로 그들을 쳐다보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는 갤러리의 모든 사람과 개인적으로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그냥 시늉만 하는 게 아니었다.”

✽고맙다는 말을 할 시점과 그 말을 하는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출전한 메이저 대회에서 그와 한 조가 되었다.” 어니 엘스는 말했다. “벨러리브에서 열린 PGA 대회 때였다. 내가 그때 몇 살이었더라. 스물두 살? 금요일에 악수를 하는데(그 놀라운 손을 잡고) 이듬해에 베이힐에서 열리는 자신의 토너먼트에 오라고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현장에서 선수를 초대한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게 내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의 대회에서 결국 우승했을 때는 정말 기뻤다.” 엘스는 그 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다.

“파머는 밤에 자러 갈 때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카리스마가 더 넘쳤다.” _샘 스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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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가 모르는 뭘 알고 있는 걸까? 연도 미상의 사진 속 아널드.

✽올바른 교육의 중요성은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단다….

“나는 아널드의 집에 머물고, 그는 우리 집에 머물렀다.” 플레이어는 말했다. “그가 남아공으로 왔을 때 그를 데리고 금광 구경을 갔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었다. 다정한 숙녀였다. 나는 그의 아버지도 좋아했다. 모두의 말처럼 그는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 프로 선수들은 서로 경쟁한다. 우리는 경쟁자들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함께 웃고, 때로는 함께 울기도 한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우리는 함께 울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위해 플레이하는 것이다.”
1986년에 워싱턴 근교에서 열린 챔피언스 대회에서 파머는 5번 아이언으로 홀인원을 했고, 다음 날 오후에 같은 티에서 홀인원을 한 번 더 했다. “돌아보니 그린 옆에 게리가 서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멋진 샷을 하고 싶었다.”
“그래, 그거다! 바로 그거다!” 플레이어는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것이든, 상대의 것이든, 승리의 순간을 어떻게 함께 나눌지 잘 알고 있었다.”
대학 생활의 행운을 빌며, 열심히 공부하기 바란다.
그럼, 이만.

여담이지만, 그는 자신의 사인이 너무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시장에서 거의 가치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기뻐했다.
1999년에 위니가 난소암으로 죽고 6년이 지났을 때 아널드는 키트를 만났다. 가족들이 두 번째 부인을 늘 반기는 건 아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아침을 함께 맞을 사람을 만났고 딸들과 손자들은 모두 기뻐했다.
파머 본인도 암 투병을 했고 전립선을 떼어냈지만 바지를 한 번 추어올리듯이 개의치 않고 일상을 이어갔다.
골프에서 그가 바란 건 아주 단순했다. “1번홀의 티잉 그라운드에 오르는 모든 핸디캡 20의 골퍼들은 이 게임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전해줘야 한다. 그리고 스윙 레슨을 받을 때마다 규칙과 에티켓에 대한 레슨도 받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지닌 것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는 자신의 대회에서 여덟 번 우승한 타이거 우즈에 대한 코멘트를 집요하게 요구받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말하겠다.” 그는 잠시 창밖을 응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누구라고 콕 집어내지 말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지 말자. 그저 골프나 다른 스포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대중과 공유하길 원하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어쩌면 다른 그 누구와도 공유하길 원치 않을 수도 있다. 이게 가장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말일 것 같다. 나는 내 인생을 대중에 공개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더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방식이 있다.”
2016년에 오크몬트에서 US오픈이 열렸을 때, 파머는 라트로브에서 비행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보잉의 회장과 아는 사이였다.” 당연히 그랬다. “그가 내게 747기를 몰게 해줬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고층 빌딩을 조종하는 기분이었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다”고 대답했다. “맨 위층에서 조종하는 것 같았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무명의 프로 선수인 샘 손더스 얘기에는 눈시울을 붉혔다. “내 손자로 사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할아버지가 남긴 평생의 업적을 따라가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2015년에 양탄자 위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오른쪽 어깨가 탈골된 이후, 파머는 놀랄 만큼 기력이 쇠한 모습으로 변했다. 안색은 창백한 수준을 넘어 잿빛이 됐다. 하지만 정신은 또렷했고 유머 감각도 여전했다. 해 질 무렵에 크고 노란 멀리건이라는 개와 산책을 하며 그는 말했다. “나도 조만간 늙을 거야.”
2009년에 펜실베이니아에서 보낸 사진 한 장이 스페인 북부에 도착했을 때 세베리아노 바예스테로스의 뇌종양은 잠시 진행을 멈췄다(완전히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아널드 파머가 내게 개 한 마리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진으로. 멀리건이라는 이름의 그의 개.” 바예스테로스는 그 사진에 담긴 메시지가 사실은 자신을 위한 기도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의사가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나는 이제 멀리건을 사용하는 셈이다.” 세베도 파머처럼 래브라도 리트리버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해서 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리 트레비노는 말했다. “아널드가 메이저 대회에서 지나치게 일찍 힘이 빠진 이유는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후회는 없을까?
“물론 거의 우승할 뻔한 네 번의 US오픈에서 실제로 우승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파머는 말했다. “아쉽게 놓친 두 번인가 세 번의 PGA에서도.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과연 다른 방법을 택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보자. 디오픈 다섯 번에 PGA 두 번, 마스터스 여섯 번 그리고 브리티시오픈도 두 번 우승하는 대신 친구들을 이렇게 많이 갖지 못한다면? 아니, 그러긴 싫다. 트로피는 넣어둬라. 밥호프 대회가 열린 팜스프링스에서 티오프를 했던 때가 기억난다. 앞선 두 라운드에서 플레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찍 나가게 됐다. 아마 아침 7시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잠옷과 가운 차림의 아니 부대가 나와 있었다.”
그는 겸손한 동시에 당당했다. 그는 서민적인 동시에 왕이었다. 아이스티와 레모네이드를 반반씩 섞었다. 그는 클럽하우스의 그릴 룸(홈코스든 아니든)을 오가며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처음 보는 사람이든 친구든) 실내에서는 모자를 벗으라고 말했다.
뜨겁게 불살랐던 87년 동안 그는 즐겁고 기품 있는 삶을 살았고, 복엽비행기를 몰고 라트로브 상공을 날며 인간의 존경과 신의 총애를 누렸다.
그리고 ‘킹’ 파머는 2016년 9월25일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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