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구원투수의 등장 [People : 1703]
사진_에릭 라이언 앤더슨(Eric Ryan Anderson)
새로운 구원투수의 등장 PGA투어의 새로운 수장인 제이 모너핸이 말하는 컨시드와 늑장 플레이, 휴대폰, 보비 오어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 글_가이 요콤(Guy Yocom)
PGA투어에 오기 전에는 펜웨이스포츠그룹의 영업 부서에서 일했는데, 일반 대중에게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모기업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2007년에 레드삭스가 최종 우승을 차지했을 때 받은 월드시리즈 반지도 가지고 있다. 투어에는 2008년에 합류했고 사실상 영업 부서인 마케팅 팀에서 일했다. 영업에 대한 내 지론은 이렇다. 뭔가를 팔아야 할 때 그걸 ‘물건을 옮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으로 이해할 때보다 훨씬 힘들다. 사람들이 지닌 필요에 어떻게 부합할 수 있을지를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제품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사람을 중시하고 제품을 사랑한다면 그건 단순한 ‘판매’를 뛰어넘는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며 제품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일종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그다음인 후속 조치다. 제품이 어떤 성능을 발휘하는지, 고객에게 더 도움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15년 전에 제품을 판매한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지낸다. 중요한 건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데, 그건 처음에 제품을 판매할 때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방법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 나는 조지프 윌리엄 모너핸 4세다. 증조할아버지인 조지프 윌리엄 모너핸은 1888년에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800년대 중반에 아일랜드의 카운티 메이오라는 곳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주의 상원의원이 됐고 대단히 실력 있는 변호사였다. 그 후에 태어난 조지프 모너핸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골프였다. 증조부는 US아마추어에 출전했고,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매치플레이에도 한 번 진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골프와 관련해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집안 사람들이 전부 ‘그래니 애니’라고 불렀던 우리 할머니였다. 보스턴 외곽에서 자랄 때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과 나를 하이애니스에 사는 할머니에게 맡기곤 했다. 우리는 온종일 9홀 코스를 돌다가 밤이 되면 닭 날개와 조개 요리를 배불리 먹었다. 코스에서 할머니는 타고난 승부욕을 발휘하며 다양한 몸짓 언어를 구사했다. 코스에서 내려오면 대가족의 구심점으로서 온 집안이 인정하는 여장부가 되었다. 할머니는 손자들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먼 거리도 마다치 않고 차를 몰았다. 아홉 살 때 참가한 한 주니어 토너먼트에서 플레이가 잘 풀리지 않은 나는 온종일 툴툴거렸고, 짜증을 내며 좋지 않은 샷을 할 때마다 과민 반응을 보였다. 코스에서 내려온 나에게 할머니는 대단히 직설적인 표현으로 내 행동을 지적했다. 할머니의 잔소리는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다. ●●● 일본에 가서 마쓰야마 히데키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또는 중국의 리하오퉁)를 보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에 어리둥절한 심정이 될 것이다. 인터넷이 발전하다 보면 히데키의 팬들이 그를 지켜보는 것을 넘어 그의 모든 샷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물론 그건 투어의 선수들과 미국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지만. PGA투어의 영향력이 한국을 비롯한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골프는 세계적인 게임이고 상거래의 중심이다. 현재 투어에는 스물두 개 나라의 선수 여든다섯 명이 있다. 성장은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흐름을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 ●●● 아널드 파머는 실내에서 모자를 쓰는 것에 반대했다. 그럴 수 있다.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래니 애니도 실내에서 모자를 쓰거나 셔츠를 밖으로 꺼내서 입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품격을 중시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한 가지에 대해서만큼은 융통성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바로 ‘휴대폰’이다. 5년 전에는 토너먼트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사진을 찍거나 전화기를 사용하면 드러내진 않아도 눈에 거슬렸다. 내가 플레이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사교적인 자리에 방해가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것도 완전히. 우리는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을 가져야 한다. 팬들이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경험을 공유하면서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멋있고 감동적이다. ●●● 누구에게나 ‘보스’가 있다. 진정한 보스가 누군지를 일찌감치 깨달은 나는 운이 좋았다. 나는 코네티컷 주에 있는 트리니티칼리지의 골프 팀에서 활동했다. 3학년 때 매사추세츠에서 열린 토너먼트에 참가했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다. 같은 팀 소속이었던 동생 브렌던은 플레이오프에서 패한 터라 뒤쪽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빌 데트릭 감독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브렌던, 너 괜찮니?” 브렌던이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토너먼트에서 그렇게 패한 것에 대해 저 자신에게 화가 나요.” 그러자 데트릭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사실상 우리 모두에게 한 말이었다. “브렌던, 네가 알든 모르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너의 셔츠 뒷면에는 네 가족의 이름이 적혀 있단다. 너는 매일 네 가족을 대표해야 하고. 그래서 잘해야 하는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오늘 그걸 잘해냈어.” 그 말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PGA투어의 커미셔너로서 나는 네 명의 선수를 포함한 아홉 명의 이사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나를 이끄는 힘은 다른 모너핸들, 특히 아내인 수전, 두 딸인 소피와 피비에 대한 책임감이다. ●●● 내가 다른 메이저리그 스포츠에 대해 가장 높이 평가하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NFL과 MLB, NBA 그리고 NHL이 시즌을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페덱스컵도 마음에 들지만, 이제 겨우 10년째이고 아직 발전하는 중이며 포스트시즌-플레이오프의 체계를 날카롭게 다듬을 방법을 항상 모색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자체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브랜드를 구축하고 상품화하는 방식이 존경스럽다. 1년 내내 존재감을 발휘한다는 것이 해당 종목에는 아주 큰 도움이 된다.
●●● 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모든 방식의 인간관계가 즐겁기만 하다. 사람들과 얘기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냥 사람들을 관찰할 때도 잦다. 심지어 불쾌한 사람들조차 그들을 삐딱하게 만든 게 뭔지 따져보는 걸 좋아한다. 그것도 내가 지금 맡은 역할에 따른 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고 그들의 상황이 너무나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필요와 목표는 물질적인 것일 수 있지만, 거기에 이르려면 인간적인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 내가 역사를 전공했다는 건 희한한 일인데, 사실 내 강점은 수학이기 때문이다. 이율, 비용 분석, 투자 수익률.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걸 머릿속으로 계산할 수 있다. 가끔 한밤중에 일어나서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머릿속으로 재무제표를 돌려본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진다. 플레이 그룹마다 스코어카드를 보면서 누가 얼마를 내야 하는지 계산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다만, 대체로 나는 스코어카드를 볼 필요도 없다. ●●● 잠은 축복이거나 저주인데, 어느 쪽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새벽 1시에 잠이 깨면 얼마 동안은 밤의 고요함을 즐기지만, 그러다가 다시 잠이 들지 못한다. 잠을 못 자는 것에 대해 걱정하면 상황이 더 심해지므로 ‘까짓것’이라고 생각하며 밤을 새우고는 다음 날 아침에 그대로 일을 하러 나간다. 마지막으로 연달아서 여덟 시간을 잤던 건 아시아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그때조차 시차 때문에 엉뚱한 시간에 잠이 왔다. ●●● 다시 레드삭스 얘기로 돌아가서, 우리 가족은 50년 넘게 시즌 티켓을 구입했다. 25구역의 괜찮은 자리였다. 양키스의 버키 덴트 때문에 모두가 슬픔에 잠겼을 때 나는 여덟 살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월드시리즈를 차지하지 못한 팀을 응원하다 보면 충성심과 인내심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레드삭스 팬들에게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2004년에는 세인트루이스에 3승 무패를 기록한 후에도 시리즈 네 번째 대회의 9회 말까지 3 대 0으로 앞서나갔다. 투아웃에 주자는 한 명이었고, 특급 마무리 투수인 키스 포크(Keith Foulke)가 마운드를 지켰지만 많은 사람이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그들은 야구와 사업 그리고 인생에서도 앞일은 알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보스턴에서 하키를 하던 아이들치고 하늘을 나는 듯한 보비 오어(Bobby Orr)의 유명한 자세를 흉내 내지 않은 아이는 없었다. 하지만 보비에게서 따라 할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오어네 집안과 가까웠다. 내가 처음으로 일했던 곳도 보비의 회사였고 우리 어머니는 보비의 부인인 페기 오어와 절친한 친구였다. 2007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줄이 도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오어 부부가 도착해서 줄 끝에 서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추운 데다 궂은 날씨였고 보비는 얼마 전에 힙 수술까지 받은 터라 걱정이 됐다. 그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톰 삼촌이 나가서 보비와 페기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조심스럽게 청했다. 보비는 삼촌의 머리가 두 개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망자에게 조의를 표할 겁니다.” 오어 부부는 2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맨 앞줄에 설 수 있었다. ●●● 최고의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한 해 동안 나는 뉴저지로 가서 로렌스빌 스쿨이라는 곳을 다녔다. 좀 더 성숙한 자세를 갖추고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나는 골프 팀에 들어갔고 예일에서 열린 동부 학교대항골프챔피언십에 출전했다. 나는 동생인 브렌던과 빌리 맨이라는 선수에게 5타 앞선 상태로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했다. 브렌던과 빌리의 플레이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 타수를 낭비했고, 결국 두 사람과 플레이오프를 벌여야 했다. 나는 세 번째 홀에서 밀려났고 브렌던은 여섯 번째 홀에서 패했다.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우리는 참담한 심정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순간은 우리 둘이 같은 경험을 통해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우리 인생에서 최고로 손꼽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다. 친구 세 명이 이틀 후에 자전거로 대륙 횡단 여행을 떠날 거라는 얘기를 했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은 아버지가 말했다. “보아하니 직장을 구하지 못한 것 같은데, 너도 친구들과 같이 가지 그러니.”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자전거가 없거든요.” 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대 사주마.” 나는 15년 동안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었지만, 이틀 후에는 페달을 밟으며 케네벙크포트를 지나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캠프장에서 숙박할 계획이었지만 값이 만만찮았다. 그래서 늦은 오후에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혹시 마당에 텐트를 쳐도 되느냐고 물어봤다. 아홉 시까지는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여섯 시에는 떠날 예정이며 물만 주면 된다고 말했다. 부탁할 때마다 다들 허락해줬다. 그리고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할 때도 잦았다. 그 여행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55일 후에는 시애틀로 돌아왔다. 우리는 모두 미국 사람들의 기본적인 선량함을 배웠다. 그 당시에도 정말 좋았지만, 돌이켜 생각할 때면 더 좋은데,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자리를 55일이나 비울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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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우리는 일가다. 세월이 흐르면서 존 F. 케네디가 3년도 채 되지 않는 대통령 임기 동안 무엇을 이뤘는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인권, 러시아와의 관계 그리고 유인 달 탐사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그는 정말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나의 영웅이다. 매사추세츠 출신인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인 성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내가 어느 가문 출신인지 안다. ●●● 어떤 친구들은 내가 커미셔너가 되면 핸디캡이 오를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 생각에는 그럴 것 같지 않다. 현재 내 인덱스는 3.9이고 최소한 그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목표다. 그리고 플레이도 일정하게 계속할 계획인데, 골프는 내 취미이고 나도 스트레스를 풀 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커미셔너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관계를 쌓고 일을 추진해야 하는 자리도 없을 것이다. 나는 300회가 넘는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라운드 횟수가 과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 개인적으로 골프에서 못마땅한 점은 ‘컨시드’다. 나 역시 그걸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토너먼트에서는 90cm 파 퍼팅을 놓고 고민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익숙해진다. 그러다가 토요일이 되면 갑자기 모든 게 인정된다. 이런 태도의 변화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게다가 신속하게 처리한다면 라운드에 추가되는 시간은 미미할뿐더러 그럴 만한 가치도 충분하다. 나는 골프든 인생이든 그냥 주어지는 것들을 믿지 않는다. ●●● 관련해서 생각해봐야 할 주제가 바로 ‘늑장 플레이’다. 나는 투어의 라운드 시간이 4시간하고도 45분이나 걸린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그 수준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일각의 비판에 불을 지피는 요인은 모든 걸 지난해보다 더 빨리 해야 한다는 현대 사회의 강박증이다. 라운드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압력을 가할 생각이냐고? 지금으로서는 아니다. ●●●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 친절하게 굴고 그럴 만하다고 생각될 때는 팁을 더 주자. 클럽 주변에서 ‘캐디들이 담당하고 싶어 하는 골퍼’로 통했던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먹이사슬을 따라 오르내리는 신세인데,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 PGA투어에서 일하는 게 화려해 보인다고? 한 가지 일화를 말해보겠다. 골프가 다시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자 코스를 지어야 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리우의 코스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우리 직원들(일단 떠오르는 몇 명만 말해본다면 리치 브로건, 칼 로스, 스티브 웬즐로프 그리고 마이클 존슨)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지주와 개발업자를 상대하고 설계가인 길 핸스와 협조하느라 다 합쳐서 리우를 130번이나 왕복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은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면서 이 일들을 해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TPC스코츠데일, TPC리버하일랜드 등의 개선 업무도 함께 담당했다. 그랬으니 올림픽이 마침내 끝이 났을 땐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들이 주어진 업무에 도전적으로 임한다는 건 잘 알지만, 그게 과연 화려할까? 그렇지 않다. ●●● 2004년에 브라이언 오츠(Brian Oates)라는 친구와 함께 ‘암에 맞서는 골프’라는 501(c)(3)를 발행했다(면세 혜택이 있는 비영리 채권). 우리와 절친한 어느 부부에게 신경아세포종(Neuroblastoma)을 앓는 자녀가 있었고 또 한 친구는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암 투병을 하던 어머니마저 2007년에 세상을 떠나자 이 취지에 개인적으로 더 깊이 공감하게 됐다. 우리는 골프가 전반적인 자선사업의 탁월한 매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브라이언과 나는 보스턴 마라톤을 통해 골퍼들에게 취지를 알린 후 골프 마라톤에 이어 ‘굿가이앤갈인비테이셔널’을 개최했다. 그러니까 자선은 내게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PGA투어의 계략이니 음모니 말이 많지만, 우리 토너먼트의 본질이 자선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23억 달러의 자선기금을 모았고 앞으로도 많은 액수를 더할 자신이 있다. 기억하겠지만 내가 숫자에 좀 강하다. ●●● 내 주변에는 아주 좋은 충고를 은근하게 들려주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서 최고는 골프 친구이자 멘토인 마크 플래허티(Mark Flaherty)에게서 들은 것인데, 그는 웰링턴의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골드만삭스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타인에게 위압감을 느끼지도 감동을 받지도 말게. 누구나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나왔고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는 거야.”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너무 엄청나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할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널드의 가르침도 좋았다. 그는 젊은이에게 골프를 가르쳐서 그걸 처음 접했을 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면 성공한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내가 새로 맡은 역할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완전하고 의식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데 골프보다 더 적합한 게임은 없다. 그런 장점을 누리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위대한 게임을 전파하는 게 우리(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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