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이 만든 조선 시대 골프 리조트 [Feature : 1711]
구한말 조선에도 골프 리조트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일제강점기에 선교사들이 타향살이에 지쳐 풍광이 좋은 조선의 경승지에 휴양지를 건설하고 부대시설로 골프장을 만들어 여가를 보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조선의 골프 리조트 3곳을 공개한다.
구한말 조선에는 천주교와 기독교 선교를 위해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의 감리회, 장로회, 성공회, 구세군 단체로 부터 선교사들이 파송됐다. 역사 속에서 알려진 선교사는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만든 의사 앨런(1858~1932),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언더우드(1859~1916),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1858~1902), 영문 성경을 번역해 현재의 한국어 성경을 만든 레이놀즈(1867〜1951)가 대표적이다. 세계 여러 단체로부터 파송돼온 선교사들이 늘어나자 각 선교 단체에서는 선교지역이 중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09년 선교 지역을 나눴다. 경기·충청·강원 등 중부 지역은 남·북 감리회, 평안도·황해도 지역은 북 장로회와 미 감리회,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회, 경북 지역은 북 장로회, 경남 지역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전남•북 호남지역은 남 장로회가 각각 맡아 선교 활동을 했다. 1920년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276명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은 조선의 각 지역에 거주하며 그들의 종교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문화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생활양식도 전했다. 이들은 생활양식과 문화적 수준이 당시 조선과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낯선 땅에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은 조선에서 질병을 앓거나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안식년을 갖거나, 일본이나 중국으로 휴양을 떠났다. 선교사들은 조선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친 심신과 풍토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황해도 구미포, 원산 갈마반도, 지리산 노고단, 금강산 온정리 등에 그들의 휴양 시설을 만들며 부대시설로 골프장을 지었다.
황해도 구미포 소래 골프장
조선에 선교사들의 휴양지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인천시 백령도 건너편에 보이는 황해도 장연군 구미포다. 1883년 조선인들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소래교회가 있어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라면 이곳을 한 번씩 방문했다. 미국 북 장로회 소속의 언더우드 목사는 1885년 3월27일 조선에 입국해 1887년 10월 처음으로 구미포의 소래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언더우드 목사는 구미포 해변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이곳을 선교사들의 휴양소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넓은 땅을 확보했다. 그리고 1905년 휴양지를 완성하고 자신의 가족과 다른 선교사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휴가를 보냈다. 초기에 구미포 휴양지는 해수욕장 너머 절벽 위에 별장만 있었지만 언더우드 목사가 골프장을 비롯한 정구장, 야구장, 산책로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소년과 남자들은 야구, 40~50대는 테니스, 골프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 후에도 개발되어 1926년에는 50여 채에 이르는 휴양촌을 형성했다. 당시 <동아일보>(1934년 8월10일 자)에 따르면 미루나무가 길옆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옆으로 골프장이 있었다고 전했다. 선교사들은 바닷가 근처에 골프장을 만들어 스코틀랜드의 링크스 골프장을 연상하며 향수를 달랬을 것이다.
구미포 소래 골프장이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언제 사라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설계자였던 언더우드 목사가 마지막으로 조선에 머물며 활동했던 1913~1914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태평양 전쟁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며 그들이 사용하던 해수욕장이 1941년 여름부터 조선인들이 독차지해 성황을 이뤘다는 <매일신보>(1941년 7월15일 자) 기사를 통해 1940년경 한반도 최초의 골프 리조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원산 외인촌 골프장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는 1898년 9월, 그리어슨 의사 부부, 맥레, 푸트 등의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 선교사들은 함경남도 원산에 선교 본부를 세우고 한반도 동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처음에 이들은 황해도 구미포 소래에 갔지만 이미 이곳에는 선교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 함경남도 원산으로 이동해 선교 본부를 세우고 한반도 동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모래가 좋기로 유명한 갈마반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던 곳에 외인촌을 형성했다. 외인촌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915년 8월에 이르러서는 별장 부지가 88필지 있었다고 하니 규모는 상당했다. 이곳도 황해도 구미포 소래 휴양지처럼 별장이 늘어나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아들자 골프장을 비롯한 테니스장과 야구장을 만들었다. 외인촌에 골프장이 만들어진 것은 1925년 7월19일(매일신보 1925년 7월31일 자)로 외인촌이 개발된 지 10여 년이 지나서다. 외인촌은 1937년 일본이 갈마반도에 비행장을 건설하며 이곳에 있던 선교사들을 강원도 화진포로 몰아냈고 골프장도 함께 사라졌다. 지금은 외인촌 자리에 원산 비행장이 있으며, 별장과 골프장이 있던 자리에 군사시설과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 노고단 골프장
선교사들은 남부 지역의 전남 지리산 노고단에도 휴양지를 만들었다. 지리산은 산림이 울창하고 높은 산이지만 선교사들은 노고단(해발 1507m)의 평탄한 고원 초지를 찾아 휴양촌을 만들었다. 조선의 남부 지역은 미남장로회가 선교 활동을 하던 지역으로 이곳에 있던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은 풍토병에 시달렸다. 그러다 보니 지역 주민들과 분리해 휴양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황해도 구미포나 원산 갈마반도의 휴양지는 남부 지역에서 가기에는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이 두 곳은 모두 해안가에 위치해 지역 주민의 출입이 잦아 지리산의 깊은 산속에 휴양촌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노고단의 이 부지는 동경제국대학이 사용하던 것이어서 1922년 천막 7동과 원목 집 6동의 임시 건물의 형태로 지어 사용하다가 1925년 동경제국 대학과 조선총독부로부터 10년 동안 임대를 받아 휴양촌을 건설했다.
이 휴양촌을 만드는 데 미국에 살던 그레이엄 부인이 거액의 기부금을 전달해 그녀의 이름을 빌려 캠프 그레이엄(Camp Graham)이라 불렸다. 당시 캠프 그레이엄의 팸플릿을 살펴보니 휴양촌 본관에는 상점, 빵집, 우체국, 이발소, 호텔, 도서관, 강당, 9홀 골프장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규모가 점점 커져 병원, 거주자 주택, 수영장, 테니스장까지 만들어졌다. 이렇게 시설이 좋다 보니 이 곳에서는 조선에서 활동하는 6개 선교부 선교사들이 모여 매년 테니스 대회를 열었고, 구름 위에 펼쳐지는 능선을 따라 골프를 즐겼다.
노고단 골프장은 만능 스포츠맨으로 불리던 레이놀즈 선교사가 한국인 인부들을 고용해 1929년에 만들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그의 사위와 한 달 내내 골프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곳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조선이 전시체제가 되자 혼란스럽던 1940년부터 조선의 모든 선교사가 추방되기 시작하며 사라졌다.
1940년 휴양촌에는 56개 동의 건물이 남아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안타깝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지리산 노고단에 골프장이 있었다고 말하면 어떻게 그 고지에 골프장이 있을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그곳에 골프장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 이러한 시설을 벤치마킹하여 조선인들이 리조트를 만들었다면 현재의 리조트 산업과 골프 산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호에서는 ‘잊혀가는 북녘의 평양 골프장’에 대해 다뤄보겠다.
글_조상우 / 정리_인혜정
Cho Sang-Woo 조상우 호서대 스포츠과학부 골프 전공 교수이며, 한국 골프사 연구와 함께 골프 골동품을 수집하고 있다. 슈페리어에서 운영하는 세계골프역사박물관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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