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골프장은 조선 시대에서 처음으로 벤치마킹을 시도했다. 효창원골프장의 장점을 참고해 코스를 설계했고 4개월이란 짧은 시간 동안 9홀을 완성한 독특한 골프장이다.
일제강점기 외국인과 일본인의 왕래가 잦던 조선의 대도시에는 일찍부터 골프장이 건설됐다. 1921년 6월 경성 효창원골프장, 1924년 7월 원산 송도원골프장에 이어 1924년 8월 31일 대구 외곽 비파산 기슭에 대구골프장이 개장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80연대가 주둔하던 서쪽 지역으로 지금은 미군 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4년 5월 6일 자에 따르면 대구골프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1922년 6월~1924년 7월)으로 있던 아리요시의 일언에 의해 건설됐다고 한다. ‘정무총감’은 조선총독부 2인자에 해당하는 자리로 조선의 행정과 사법을 통괄하는 권력을 가졌다.
그런 이유로 대구골프장은 1924년 5월 6일 신설 계획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4개월 만에 9홀이 건설됐다. 이렇게 빠르게 결정이 이뤄진 건 아리요시의 권력이 대구 민관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골프장 건설 회의가 경북지사 관저에서 열리던 날, 7만 평에 이르는 골프장의 부지 문제가 바로 해결됐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서재조가 부지를 기부한 것. 또 짧은 기간에 골프장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제반 설비가 적어 당시 대구 부윤으로 있던 마쓰이가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성에 상경해 효창원골프장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대구골프장의 개장식에는 경성으로부터 조선총독부 내무국장 오쓰카를 비롯한 25명, 부산에서 5명, 대구에서 약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오전에 골프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경기를 치렀다. 1등은 오쓰카가 차지했다. 영국에서 골프를 배운 오쓰카는 아리요시 총감과 함께 경성골프구락부 창립과 효창원골프장이 청량리골프장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골프장 건설을 지시했던 아리요시는 골프장이 개장하기 전인 1924년 7월 4일 총감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듬해 요코하마 시장이 됐다. 안타깝게 그는 대구골프장(1924년 8월 31일 개장)은 물론 경성 청량리골프장(1924년 12월 6일 개장)에서도 골프를 즐기지 못했다.
더블 티 시스템을 도입하다
그동안 대구골프장은 대구골프구락부로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공개된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이 모임의 공식 명칭은 ‘사단법인 대구골프회’였다. 대구골프회의 조선인 회원은 박흥갑, 이창근, 서병조, 정운용, 서연식, 주병갑 등 13명이다. 이창근과 서병조는 이사, 정운용, 서연식은 경기위원, 박흥갑은 임원으로 활동했다. 대구골프회는 매년 유하컵, 합동은행, 대구일보, 조선민보, 부산대항 등의 크고 작은 대회를 개최했다. 1938년에는 30개의 대회가 개최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을 했다.
대구골프장은 회원제 골프장으로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 플레이할 수 있었다. 골프장 규모는 개장 당시 9홀(2870야드, 파35)이었으나 회원이 늘어나자 더블 티 시스템으로 전장 5590야드, 파69로 만들어 운영했다. 위 사진은 대구골프장의 코스 지도와 일본에서 출간한 <일본골프연감>에 소개된 대구골프장이다. 교통편, 그린피, 스코어카드 등을 소개한다. 이 책에는 일본은 물론 조선, 만주, 대만 등 일제강점기에 있던 골프장을 모두 소개하고 있다.
다음 경기 사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중앙의 건물은 클럽하우스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일요일에만 음식을 제공했다. 최근 국내 골프장도 평일 내장객이 줄면서 평일에는 그늘집 운영을 중단하고 주말에만 운영하는 곳이 많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내장객이 많은 일요일에만 클럽하우스를 운영했다는 점을 보아 평일 내장객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구골프장은 비파산 산기슭에 만들어 물이 없는 메마른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코스 지도에서는 개천이 흐르는 해저드를 볼 수 있고, 경기 사진에서는 잔디가 잘 관리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메마른 곳이라 전해 내려오는 것은 개장 초 산기슭에 급하게 코스를 만들며 잔디를 제대로 조성하지 못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 아다치건설그룹에 따르면, 이 회사는 1931년 대구골프장을 조성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어떤 공사가 이뤄졌는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코스의 재정비나 더블 티 박스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다치건설그룹은 당시 경성, 원산, 부산골프구락부 골프장 조성 공사에도 참여했으며, 현재도 일본에서 골프장 건설과 운영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남아 있다. 필자가 몇 해 전 아다치건설그룹에 의해 조선의 골프장들이 조성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회사에 서신을 통해 당시 조선의 골프장 조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자 연락을 취했지만, 지금까지도 회신을 받지 못해 안타까움이 남는다.
일제강점기 골프구락부와 골프회의 기능은 골프장 운영과 관리뿐만 아니라 조선 상류사회의 사교 모임 기능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은 대구골프회의 회원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 나자 이들을 위한 송별 골프 대회를 알리는 우편엽서로 1932년 2월 21일(일요일)에 개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들은 경북도청 등 대구 지역에 있던 고위 인사들이다. 이렇게 골프를 즐기던 관계의 고위 인사들은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더라도 골프와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구골프장 건설과 운영을 위해 경성 효창원골프장을 벤치마킹했던 대구 부윤 마쓰이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마쓰이가 대구 부윤 임기를 마치고, 1927년 5월 평양 부윤으로 발령 나자 1928년 10월 28일 평양골프장의 건설에도 관여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골프를 즐기던 골퍼들은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에 거주하더라도 골프장 건설에 참여했다. 새로운 골프구락부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조선 골프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글=조상우
조상우는 호서대 스포츠과학부 골프 전공 교수이며, 한국 골프사 연구와 함께 골프 골동품을 수집하고 있다. 슈페리어에서 운영하는 세계골프역사박물관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인혜정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ihj@golfdige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