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의 아이언맨부터 짱구가 부르짖는 액션가면에 이르기까지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 가상의 영웅은 정말 많다. 그런데 제아무리 힘이 센 슈퍼맨이나 영원불멸의 울버린(엑스맨)이라고 해도 투어 프로의 캐디를 하라고 골프백을 던져 주면 9홀이 채 지나지 않아 영혼이 탈탈 털릴지도 모른다. 프로 골퍼의 캐디를 한다는 게 그만큼 체력이나 정신력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곳이 미국이든 유럽이든 우리나라든 상관없다. 남자 프로든 여자 프로든 상관없다. 투어에 출전하는 프로 선수의 캐디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아마 장딴지 근육이 파열되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고 폐는 찢어질 듯 아플 것이며 코와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할지도 모른다.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이 필요할 만큼 멘탈에 심한 스크래치가 나서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발생한 탈모를 염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결국 일자리를 잃고 집에서 손가락만 빨게 될지도 모른다.
하룻밤에 섹스를 다섯 번 해도 남아 도는 체력(특히 하체)과 지구력 + 신경정신과 의사 수준의 의학 지식 + 희대의 사기꾼 못지않은 뛰어난 언변과 붙임성 그리고 친화력 + 러시아 정보국에 잡혀도 절대 비밀을 말하지 않을 것 같은 영국 스파이의 무거운 입 + 몽골의 부족이 가지고 있는 5.0 이상의 시력 + 상대에게 ‘나가 죽어’라는 말을 들어도 그 앞에서는 웃을 수 있는 참을성 + 어느 나라 음식이든 소화해 낼 수 있는 비위와 소화력 + 아무 데서나 자도 마치 집에서 숙면을 취한 것처럼 푹 잘 수 있는 적응력 + 시어머니와 20년을 산 며느리가 가진 성실성과 눈치 + 고부간 갈등을 조율해 온 남편이 가진 조정력과 판단력 + 조연으로 잔뼈가 굵은 연기자의 절대적인 연기력 + 팬들의 사인 요청 순서를 잘 기억하고 있다가 순서가 뒤바뀌지 않게 챙겨 주는 기억력과 센스 + 전문 에이전트 못지않은 연봉(인센티브)에 대한 협상력 + 여행사나 항공사 직원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항공 스케줄에 대한 정보력 + 선수 대신 성질을 내거나 주먹을 내지를 수 있는 야수성 + 세계 각국 골프장의 지형지물을 빠른 시간 내에 파악할 수 있는 독도력과 감각 + 바람이 어디에서 어디로 부는지 어느 정도 속도로 부는지 정확하게 파악해 낼 수 있는 분석력 + 장시간 운전이 가능하고 곳곳의 지름길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주행 능력
이것은 투어 전문 캐디를 비롯해 프로 선수 그리고 몇몇 골프 업계 관계자 도움을 받아 작성한 리스트다. 아주 간단히 작성한 것이다. 만약 거르지 않고 모두 리스트에 올렸다면 아마 그 분량이 세 배 정도 많다고 보면 된다.
이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투어 캐디를 할 수 있다. 엑스맨의 울버린과 같은 몇몇 참을성 바닥인 능력자는 몇 홀 지나지 않아 선수를 향해 날카로운 무기를 들이밀 수도 있다. 자존심은 저만치 밀어 놔야 한다. 쓸데없는 고집은 집에 가서 부려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전문 캐디를 하려면 적어도 해병대를 두어 번 다녀와야만 생길 수 있는 끈기와 참을성이 있어야 “저 친구 괜찮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선수 부모나 매니지먼트 또는 후원사 관계자 간섭도 무시할 수 없는 스트레스 요인이다. ‘참을 인(忍)’ 세 번이 필요한 순간이 하루에도 열두 번이다.
체력은 캐디에게 기본이다. 20kg 가까운 투어 캐디백을 메고 선수보다 더 많이 걸어야 한다. 매번 거리 체크까지 해야 하므로 걷는 양이 상당하다. 2016년 JTBC파운더스컵 프로암 대회 마지막 홀에서 박찬호는 당시 세계 랭킹 1위인 리디아 고의 캐디로 나선 바 있다.
이때 리디아 고가 박찬호에게 골프백 무게가 약 18kg이라고 했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직접 캐디를 경험해 본 그는 “캐디백이 그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고 하소연했다. 박찬호의 하체는 공주 공산성을 토끼뜀으로 오르내리는 트레이닝으로 다져진 하체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힘들어 할 정도면 굳이 부연 설명하는 게 부질없다.
전 세계의 투어 캐디들이여! 그대들은 영화 속 그 어떤 영웅보다 강하다는 걸 잊지 말자. 그리고 그대들이 있기에 그동안 세계적인 선수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부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백을 메길 바란다. 우리도 그대들을 응원할 테니.
<투어 캐디의 조건 : 현실 편>
1. 자신이 못 치고 나한테 화풀이해도 받아 주기
2. 먹지도 않는 음식이나 물병을 캐디백에 넣어도 들어 주기
3. 골프백에 넣은 음식이 찌그러져서 욕해도 미안하다고 말하기
4. 분명 내가 확인한 거리가 맞는데 선수 자신이 파악한 거리가 옳다고 우기면 한발 물러서서 인정하기
5. 매번 컷 탈락하면서 요즘 볼이 잘 맞는다고 잘난 척해도 받아 주기
6. 선수는 비싼 호텔에서 묵으며 맛있는 음식 먹고 나는 허름한 여관에서 자며 싼 음식을 먹더라도 서러워하지 않기
7. 15kg 이상의 무거운 골프백 들쳐 메고도 맨몸으로 걷는 놈 잘 따라다니기
8. 선수 몸 챙긴다며 옆에서 호들갑 떠는 선수 부모 비위 맞추기
9. 공략법 조언해 주면 듣지도 않는 선수,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잘리니 기분 상해도 계속 조언하기
10. 선수가 못 챙긴 볼이나 장갑을 가져오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기
일러스트_김중화
[고형승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tom@golfdige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