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문턱에서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4명이 한 차에 올랐다. 성향도 식성도, 심지어 골프 실력도 제각기 다른 개성 강한 사람들이 뭉쳤다. 우리는 같은 코스를 방문해 어떤 곳을 바라보고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 각자 적어보기로 했다. 그냥 일기를 끄적이듯 말이다.
메이저 대회의 잔상이 서린 코스
골든베이골프앤리조트는 6년간 최고 상금이 걸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한화금융클래식이 열린 곳이다. 대회 기간만 되면 국내외 최고의 선수들을 보기 위해 몰려온 갤러리와 발 빠른 취재를 통해 다양한 소식을 알리려는 미디어 관계자들로 북적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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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베이골프앤리조트를 찾은 건 3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한화금융클래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고 상금을 내건 메이저급 대회로 치러지고 있었지만 메이저 대회는 아니었다. 이듬해인 2017년에 한화클래식으로 대회명을 바꾸고 제이드팰리스골프클럽으로 대회장을 옮기면서 메이저 대회로 격상됐다.
당시 골든베이는 프로 선수들도 치를 떨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은 선수들의 공을 무릎까지 올라오는 러프로 밀어내기 일쑤였다. 바로 옆 홀로 떨어지는 공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선수와 캐디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홀과 홀 사이의 비탈진 러프에 공이 들어가면 둘 중 하나는 찾기를 포기해야만 했다.
플레이 시간은 6시간을 훌쩍 넘기는 게 다반사였고 선수도 갤러리도 9월 초 뜨거운 날씨(그때까지도 태안은 더웠다)에 지쳐가곤 했다. 힘들게 플레이하는 만큼 우승자의 면면만 보더라도 우승할 만한 선수가 우승할 수 있었다.
최나연(2011)을 시작으로 유소연(2012), 김세영(2013), 김효주(2014), 노무라 하루(2015), 박성현(2016)까지 우승자 전부가 현재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활동 중인 선수들이다. 그만큼 아무에게나 곁을 내주지 않는 도도함으로 중무장한 콧대 높은(?) 골프장이었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골프장의 모습은 마치 과거 전장에서 무수한 적군의 목을 자신의 거대한 칼로 베어버리던 젊은 장수가 어느덧 인자한 미소를 띤 중년의 장군이 되어 함께 나이를 먹은 말 위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과함은 줄고 터프한 인상은 부드럽게 변했다.
선수들을 괴롭히던 러프는 골프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때마침 바람마저 잔잔하게 불어와 더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바다를 향해 티 샷을 날리고 석양에 물든 페어웨이를 걷는 기분은 환상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서해안 골프장만 가지고 있는 큰 프리미엄이지.’
라운드를 마치고 일행이 묵을 리조트로 향할 때는 또 한 번 묘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리조트 1층은 대회 기간 프레스센터로 변모했다. 리조트로 들어가는 입구에 마련된 커다란 스탠드 재떨이 근처는 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었다. 담배를 피우든 피우지 않든 상관없이 어떤 이슈가 발생하면 이곳에 모여 격론을 펼쳤다.
2012년 대회에서 ‘벤틀리 소녀’라는 수식어가 탄생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아마추어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한 서연정이 부상으로 3억원 상당의 벤틀리가 걸린 17번홀에서 홀인원을 기록하며 사건은 발생했다. 아마추어 신분이기 때문에 특별상이나 상금은 지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KLPGA의 입장과 그 해 개정된 대한골프협회(KGA)의 아마추어 규정이 달라 혼선을 겪었다. 결국 선수 측에서 “벤틀리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마무리됐다.
우리나라 골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이제는 누군가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하나하나 조각을 찾아 맞추는 퍼즐은 여행의 즐거움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고형승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tom@golfdige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