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인터뷰] 마스터스 출전 최초의 흑인, 리 엘더의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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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인터뷰] 마스터스 출전 최초의 흑인, 리 엘더의 이야기 #2
  • 전민선 기자
  • 승인 2019.09.2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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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든다섯 살인 리 엘더가 흑인 골퍼로서 최초로 마스터스에 참가한 일화, 그 두번째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거스타내셔널의 직원들의 행동은 특히 감동적이었다. 대부분의 직원이 흑인이었고 금요일에 그들은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은 채 내가 그린으로 올라갈 때 18번홀의 페어웨이에 도열했다. 그들의 모습은 유니폼 때문에 바로 눈에 띄었다. 그 사람들이 그걸 미리 계획했다는 게 정말 감동적이었다.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깊은 저음이 박수갈채 위로 울렸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엘더 씨!” 다른 직원들도 그 뒤를 이어 같은 말을 외쳤다. 그곳에 출전함으로써 내가 성취한 것에 대한 모든 찬사 중에 가장 뜻깊었던 건 바로 이것이었다.

거만하게 들리는 걸 원치 않지만 나는 실력 있는 흑인 선수 명단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PGA투어에서 4승을 거뒀고 챔피언스투어에서 8승 그리고 해외에서 네 번 우승했다. 나는 서른세 살이던 1968년에야 투어에 합류했다. 게다가 그때는 잭 니클라우스와 톰 왓슨, 레이 플로이드, 허버트 그린, 톰 와이즈코프, 조니 밀러를 비롯한 수많은 쟁쟁한 선수들이 활약하던 때였다. 그들을 눌러 이기기란 정말 어려웠다.

루키 시즌에는 애크런의 파이어스톤에서 열린 아메리칸골프클래식에서 잭을 상대로 서든데스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그곳은 잭의 뒷마당과 같은 곳이었고 관중은 일방적으로 그를 응원했으며 잭은 다섯 번째 홀에서 나를 꺾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플레이를 펼쳤다. 대회마다 이런 상대를 만난다면 여기서 우승하기란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66년까지 나는 골프협회연합(UGA)투어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 많은 사람이 나더러 PGA투어에 도전해봐야 한다면서 큰 무대가 쉬울 거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심리적으로 나는 느슨한 코스에서 이름이 아널드 파머가 아닌 선수들을 상대할 때만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실력이 어디서나 통하고 투어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선수보다 더 뛰어나지는 못할망정 뒤지는 수준은 아니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나는 서른한 살이었고 오랫동안 내기 게임에서는 투어 수준의 골퍼들에게 여러 번 이겨왔지만 여전히 나 자신을 믿지 못했다. 소수 인종과 빈곤 가정 출신에게는 자신감의 결여와 낮은 자존감이 늘 문제가 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격려로 결국 1966년에 올림픽클럽에서 열린 US오픈에 참가했다.

1966년 US오픈에서 컷을 통과하면서 시각이 바뀌었다. 내게 영감을 준 한 가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는 조니 밀러라는 젊은이와 함께 플레이한 처음 두 라운드였다. 그는 열아홉 살의 풋내기였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의 자신감이었다. 그도 나처럼 다른 선수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도 행동하는 걸 보면 마치 그곳이 자기 집 같았다. 나도 이 아이처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한테 테디 로즈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하면 다들 그가 그렇게 뛰어날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는 정말 위대했다. 나를 비롯한 다른 흑인 선수들보다 한 수 위였다. 내가 열여덟 살이었을 때 나를 자신의 캐디로 삼아서 플레이하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테디였다. 테디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걸 배웠다. 볼 스트라이킹에서 테디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뿐인데 벤 호건과 전성기의 토미 볼트였다. 테디는 모든 클럽으로 뛰어난 샷을 했고 할 때마다 정확하게 볼을 맞혔다. 임팩트 구간에서 그 정도의 컨트롤을 발휘한 건 호건뿐이었다.

클리프 해링턴이라는 이름은 아마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는 흑인이었지만 인종을 떠나 내가 본 가장 유망한 골퍼였다. 1960년대에 그는 육군 병장이었고 개인 시간을 이용해 출전한 중남부의 지역 토너먼트에서 많은 우승을 거뒀다. 전군 챔피언이었고 켄터키에 자리한 포트 캠벨의 프로가 됐다. 그는 파워와 기교, 감각과 정확함까지 모든 것을 갖추었고 겁을 모르는 승부사였다.

많은 사람이 클리프에게 전역해서 PGA투어에 도전해보라고 강권했다. 하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클리프는 그걸 피했다. 1965년에 두 번째로 파병된 베트남에서 그는 전투 중에 숨을 거뒀다. 나는 투어에 합류해 성공을 거둔 후에 클리프 생각이 자주 났고 그가 여기에 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곤 했다. 나와 캘빈 피트, 찰리 시퍼드, 테디 로즈, 제임스 블랙을 비롯한 여러 흑인 선수들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클리프는 충분히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수 있고 어쩌면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

올해 플레이어스챔피언십에 나갔는데 젊은 선수들이 샤론과 나에게 아주 상냥하게 굴고 골프계에 많은 공헌을 해줘서 고맙다며 와서 인사를 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예외 없이 선수의 부모들과 먼저 얘기를 나눴고 어린 친구들은 저 어른이 누군지 귀띔을 해주어야 내게 다가왔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나는 그들 중 상당수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수 생활을 그만뒀으니까) 게임의 역사와 전통이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너무 바쁘고 돈은 넘쳐나고 당장의 일에만 몰두한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젊은 선수들의 삶의 속도와 두둑한 지갑이 역사에 대한 이해를 저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타이거 우즈를 처음 본 건 그가 열네 살 때였는데 그는 열정을 지닌 평범한 주니어 골퍼였다. 그 나이치고는 실력이 뛰어났고 재능이 있었지만 성공을 장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 때 다시 그를 봤는데 그때는 아주 뛰어난 선수가 되겠다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야망이 컸고 파워와 기본기가 엄청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상태는 아니었다. 특히 샌드 게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볼을 스탠스에서 지나치게 뒤쪽에 놨고 모래를 너무 많이 파냈으며 볼에 너무 가까운 지점을 맞혔다. 그런데 1997년 마스터스에 출전했을 때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올라 있었다.

젊은 친구들을 도와주고 힘을 실어주는 건 좋은 일이다. 한번은 웨슬리와 조지 브라이언이라는 젊은 친구를 알았는데 트릭 샷 묘기가 아주 뛰어났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돈을 버는 방법을 몰랐다. 나는 그들에게 다리우스 러커의 자선 토너먼트에 이어 크리스 터커의 대회에서도 일할 수 있게 주선해주었다. 웨슬리는 특히 뛰어난 골퍼였고 순식간에 PGA투어에 입성했다. 그러더니 헤리티지클래식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어떤 사람의 성공에 내가 일조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참 뿌듯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나는 10남매의 막내다. 우리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입대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유럽에서 전사했다. 어머니도 석 달 뒤에 돌아가셨는데 누나의 말에 따르면 상심한 탓에 기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대공황 시절에 생계를 책임질 사람도 없이 집에는 아이들만 가득했다. 내가 열한 살 때 세라 고모가 집에 왔다가 내가 방치된 것을 보고는 나만 데려갔다. 처음에는 고모를 따라 위치토폴스에서 살다가 나중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다.

고모가 나를 데려가기 전에는 레이먼드 형이 나를 돌봐줬다. 형도 어린애였고 집에서는 상당히 못되게 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학교나 골프 코스에서 캐디를 하러 갈 때 따라가는 걸 허락해줬다. 내 돈을 뜯어내려는 불량배들을 막아주기도 했다. 레이먼드 형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형을 생각하면 늘 정겨운 마음이 드는데 어린 시절에 나를 챙겨준 사람은 형뿐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고모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내게 사랑과 규율을 심어주었고 선을 많이 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기품이 넘쳤고 사람들과 유연하게 소통하면서 내게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었다. 열여섯 살쯤에는 혼자 독립했지만 고모는 그렇게 내가 나 스스로를 돌볼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 캐디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플레이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18홀을 플레이한 건 열여섯 살 때였다.

글_가이 요콤(Guy Yocom) / 정리_전민선 골프다이제스트 기자(jms@golfdig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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