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없는 터널에 갇혀 있던 이준석이 13년 만에 그 끝에서 빛을 봤다. 드라이버 입스, 갑상샘암도 극복한 인간 승리. 그는 남자 골프 최고 권위의 KGA코오롱제63회한국오픈에서 그간의 역경을 보상받았다.
글_주미희 / 사진_윤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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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13년 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 같다. 정말 많이 바빠졌다. 인터뷰 요청, 매거진 촬영이 많아져서 연습할 시간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거의 휴식 시간 없이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우승했다는 게 더 실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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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아내와 자녀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아내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기뻐했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우승을 바랐는지 알고 또 얼마나 고생한지 아니까. 우승하면 아이들이 원하는 선물을 해주겠다고 공약을 걸어놨다.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 아들에게는 고가의 레고를, 둘째 딸에게는 공주 인형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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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가장 고마웠을 것 같다. 아내는 내가 운동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줬다. 육아에 대한 부담, 금전적인 부분, 가장의 무거운 책임감을 덜어주려고 많이 노력했다. 나를 이해해주려고 하고 내 공간을 최대한 만들어서 운동에 집중하도록 애썼다. 내가 보이는 것과 달리 (운동할 때) 예민한 성격이고, 또 운동선수는 본인의 운동에 대해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특히 그런 시간이 길었다. 가족이면 가족, 일이면 일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희생을 정말 많이 했다. 우승 후 일정을 끝내자마자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 감동을 함께 나눴다.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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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인터뷰에서는 펑펑 울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겪은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지나가기 시작했다. 고생했던 시절도 생각나고 가족 얘기가 나오니까 갑자기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응어리진 게 풀리는 듯한 느낌이어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오랜 시간 간절히 첫 우승을 바랐다. 원래 눈물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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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역경이 많았다. 6년 동안 드라이버 입스도 겪었다. 입스는 본인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온다. 드라이버 입스의 경우 샷이 양쪽으로 터무니없이 벗어나는 게 반복되면 심리적으로 타격이 오면서 겁이 나기 시작한다. 그게 입스로 발전하는 단계다. 입스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나 같은 경우 맞지 않는 클럽을 계속 사용하다 보니 입스가 시작됐다. 내 스윙을 잊어버리고 성적도 좋지 않다 보니 정신적으로 불안함이 시작됐다. ‘좀 더 신중하게 클럽을 사용했더라면’ 하는 후회도 많이 했고, 수많은 시간 동안 골프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오기가 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어떻게든 극복해내려고 투어 생활을 이어갔다. 입스를 겪으면서도 어떻게 막고 막아 투어 시드는 계속 유지했다. 지금도 입스를 안고 있다. 아예 없어지지는 않더라. 입스가 정말 무서운 병인 게 입스 때문에 은퇴하는 선수도 많다. 극복해낸 선수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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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입스를 안고 있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극복한 거라고 생각한다. 방법을 터득했다. 예전에는 완전 ‘멘붕’이라고 해야 하나. 방법이 없었다. 티잉 에어리어에만 올라가면 손이 떨리고 호흡도 가빠지고 머리가 백지처럼 하얘졌다. 입스가 정말 무서운 이유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몸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기할 때 연습 스윙으로 만들었던 백스윙을 전혀 하지 못하고 몸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진다. 지금은 마음가짐을 바꿨다. 미스 샷이 나와도 그러려니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고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입스라는 느낌을 잊어버렸다. 다행히 아이언이 강점이어서 티 샷이 삐뚤게 나가도 아이언으로 커버해 지금까지 온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존버(끝까지 막연하게 버티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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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가 승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강조하는 게 그 부분이다. 버텨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려면 포기하고 싶었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니까. 내 고생은 나만 알고 가족이나 주변에 정말 친한 사람들, 오랫동안 나를 알아왔던 사람들만 알면 된다. 다만 입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 건 보통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상상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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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에 미쳐 있었다는 표현도 했다. 골프는 내 인생에 늘 어려운 숙제였다. 자다가 일어나서 클럽 잡고 스윙을 해본다거나, 선잠을 자는지 자면서도 골프에 대해 생각했다. 입스 경험자들의 특징이 걱정이 너무 앞선다는 것이다. 입스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니 골프에 미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빨리 떨쳐내고 싶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출구가 없는 터널에 갇혀 있는 느낌이랄까. 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 힘들었다. 어두운 길을 계속 걸어가는데 나갈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고 그런 상황이었다. 주변에서 불쌍하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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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도 했을 것 같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있는 건가’하고. 처음에는 많이 했다. 조금씩 극복하면서 2017년부터 골프가 안정됐다. 골프가 잘될 때는 나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골프만 계속해왔고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보니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이 겁이 났다. 골프에 쏟아부었던 열정, 노력을 따지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아무래도 골프에 미련이 많이 남았다. ‘조금만 더 해보면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 ‘조금만 더’를 지금까지 이어왔다. 나도 처음에 믿기지 않았다. 첫 우승을 값지게 했다는 게 내가 여태까지 버틴 모든 노력에 대한 큰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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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갑상샘암 수술까지 했다고 들었다. 눈물을 괜히 흘렸던 게 아니다. 일이 많았다(웃음). 골프에 대한 한과 응어리가 많이 생겼다. 3년 전 갑상샘암 진단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 아무래도 골프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수술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지만 주치의가 전이되면 더 큰일이라며 지난해 말 수술을 권했다. 수술하고 생각을 바꿨다. 전이 없이 깔끔하게 끝나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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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완치된 건가? 추적 검사를 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큰 문제는 없다. 갑상샘암 수술 후기를 보면 피곤함을 잘 느낀다고 해서 올해 투어에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골프는 연습 라운드를 포함하면 5일 내내 걸어야 하고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기에 체력이 중요하다. 올해 비가 많이 와 잔여 경기가 잦았다. 특히 지난 6월 SK텔레콤오픈에선 마지막 날 34홀을 돌아야 했다. 체력이 떨어지다 보니 후반에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다음 대회였던 한국오픈에서는 다행히 몸이 많이 적응된 느낌이었고 잘 버텼다. 마지막 홀에서 티 샷을 한 뒤 허벅지에 쥐가 날 정도로 체력을 쥐어짜며 경기했다. 지금은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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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말고 평상시에는 뭘 하는지 궁금하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주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걸 많이 한다. TV 시청, 영화 감상, SNS 소통 등을 한다. 집돌이 성향이 있어서 쉴 때는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추구한다. 가족이 그런 부분을 이해해줘 고맙다. 내 공간을 중요시하는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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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웨이’ 성격인 것 같다. 은근히 고집이 세고 생각보다 예민하다. 생긴 것과 다르게 섬세한 부분도 있다. 더 발전하기 위해 골프에 대해 파고들어 실패도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하다 보니 지금 위치에 있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거나 변수가 생기면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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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우승 후의 행보랄까. 다음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만감이 교차하는 게 우승했으니까 편안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는데 또 욕심이 난다. 골프 선수는 보여주는 직업이다 보니까 그래서인지 성적에 대한 부담감도 스트레스의 일부다. 사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서 더 잘되는 것도 아니다. 이제부터 다시 잘 준비해 성적을 올리는 데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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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으로 한 우승이 아니다”라는 소감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감 있는 스타일로 보였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입스를 겪으면서 자신감이 바닥 이하를 쳤다. 주니어, 아마추어 시절에는 남다른 커리어(호주 국가 대표)로 기대도 많이 받았고 한국으로 들어와 Q 스쿨도 수석으로 통과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길을 계속 밟아가고 있었다. 그때는 자신감도 넘쳤고 내 골프 인생에 기대도 정말 많았다. 프로 데뷔하자마자 그 어린 나이에 입스를 겪으면서 커리어가 끝나는 분위기로 흘러가니까 절망적이었다. 그간 우승 기회가 왔을 때 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무너졌다. 그 빈칸을 채우려면 뭐가 필요할까 고민도 많이 했고 골프에 집착도 했다. 올해 들어 실력이 많이 좋아졌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만큼 나를 믿고 자신감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느꼈지만 골프에 두려움, 의문이 생기면 골프가 좋아지지 않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일지라도 나를 믿어보자는 마인드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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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비어 있던 빈칸은 자신감인가. 그렇다. 자존감을 갖는 게 중요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내고 있음에도 나에게 채찍질을 많이 했고 그러다 보니 내가 있는 위치보다 자존감이 낮았다. 그게 방해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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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발전한 부분을 꼽자면? 약점 중 하나였던 퍼팅이 향상되면서 우승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올해부터 최종환 프로에게 퍼팅을 배우고 있다. 어드레스가 많이 개선됐다. 스트로크 시 안정적인 시작을 만들어주다 보니 결과도 좋아졌다. 퍼팅도 믿음이다. 결과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니 금방 복구할 수 있고, 이번 한국오픈처럼 중요한 퍼팅이 남았을 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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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보면서 느끼는 건데, 박찬호 닮았다는 말 많이 듣지 않나. 너무 많이 듣는다(웃음). 수염을 기르면 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다.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수염을 깎고 다녔는데 한국오픈에서 수염을 깎지 않았더니 임팩트가 센 것 같다고 하더라.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구자철 회장님도 수염을 길렀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솔직히 예전에는 수염이 콤플렉스였다. 한국 정서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2018년 현대해상최경주인비테이셔널에서 연장전 끝에 2위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아서 그 후 수염을 잘 깎지 않는다. 지금은 내 트레이드마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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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즌 동안 이루고 싶은 것은? 이루고 싶은 궁극적인 목표는 이뤘다. 우승. 다음 목표는 더 CJ컵이다. 정말 나가보고 싶다. 잘 풀리면 대상, 상금왕도 해보고 싶다. 내 골프 인생의 가장 긴 목표는 오랜 시간 투어에 남아 꾸준히 성적을 올리는 선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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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제네시스 대상을 받는다면 유럽피언투어에 갈 생각인가. 연말에 코로나19 상황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유러피언투어,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 대한 로망이 있긴 하다. 하지만 Q스쿨을 보면서까지 도전하기에는 가족도 있고 나이도 많이 찼고 좀 늦지 않았나 싶다. 만약 가게 된다면 시드를 받든가, 해당 투어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우승해서 가는 방향을 생각해봤다. 그때 가서 가족과 상의해봐야 한다. 내가 원한다면 한 해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한국 골프도 충분히 성장했기 때문에 떠나는 것 자체를 많이 생각해야 한다. 요즘 선수들이 다 잘해서 먹고살기 힘들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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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봐서는 빅 리그 스타일이다. 해외 투어에 나가는 것에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외국 투어에서 워낙 많이 활동했고 외국 생활도 오래 했기 때문에 언어, 음식 등에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코리안투어에서 이제 1승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 입지를 더 넓히고 싶다는 생각도 크다.
PROFILE
나이 만 33세
이력 코리안투어 QT 수석 합격(2009년)
원아시아투어 QT 수석 합격(2014년)
우승 KGA코오롱제63회한국오픈(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