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품을 보면 참지 못하는 장비병 말기 환자의 쇼핑은 무엇보다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여기서 효율성이란 아내의 잔소리를 교묘하게 피해서 장비를 사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이 높은 것을 말한다. 아내의 등짝 스매싱도 피하고 원하는 장비도 얻고 싶은 골퍼라면 선구자들의 노하우를 참고해보자.
◆최지영. 30대 슬픈 남자 코스프레
골프 클럽을 사고 싶은데 아내의 윤허가 필요할 때는 회사 동료나 친구들과 함께 스크린 골프장이나 골프 코스에 다녀온 후 자존감 바닥 코스프레를 한다.
아내 옆에서 나지막이 ‘아 진짜 그냥 죽는 게 나은 건가, 이것만 있었으면 마지막에 이길 수 있는 건데(한숨 푹푹), xx(친구)가 자랑하면서 엄청나게 놀린다, 나만 이게 없다, 스트레스받는다, 살기가 싫다’ 등을 시전한다.
며칠 동안 축 처진 어깨와 불쌍해 보이는 눈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지내다 보면 남편 기 살려준다는 명목으로 골프 클럽 구매를 허락해준다.
◆익명, 40대 5년째 같은 커버
아내는 클럽 수 제한이 14개인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 이상 클럽을 사면 100% 걸린다. 일단 14개까지는 저렴한 클럽으로 허락받고 구입한다. 그런데 너무 사고 싶은 신형 드라이버가 출시하면 일단 드라이버를 주문하고 택배 받을 주소는 회사 주소를 적는다.
기존 드라이버는 당근마켓을 통해 빠르게 처분하고(가장 중요하다) 그 자리에는 신형 드라이버가 들어가는 거다. 클럽 수의 변화가 없고 같은 제조사에서 만든 드라이버라면 디자인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같이 쳐도 잘 모른다.
주의할 점은 헤드 커버를 바꾸면 안 된다는 것이다. 헤드 커버는 언제나 사용하던 헤드 커버를 씌우는 것이 안전하다.
◆익명, 40대 고뇌하는 남자
아내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고 같이 골프를 즐기기 때문에 샤프트만 바꾸는 등의 테크닉은 통하지 않는다. 일단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내 골프용품을 먼저 사준다. 두 배의 돈이 나가지만 윤허 속도가 4배는 빨라진다.
두 번째 전략은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속해서 가격 비교를 하며 살까 말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다. 아내가 나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순간 작전은 성공이다.
요즘은 클럽을 사기 전 너무 오래 살펴보니 오히려 그만 알아보고 빨리 사라며 윽박지르기도 한다. 남편이 돈을 막 쓰는 것도 싫지만, 한두 푼 때문에 지질하게 콩나물값 깎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더 싫은가 보다.
◆조태훈, 40대 잘 주는 선배
평소 아내에게 돈 잘 벌고 후배들에게 잘 퍼주는 착한 선배에 관한 이야기를 가스라이팅처럼 해둔다. 일단 아내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자잘한 용품들을 보여주며 그 선배가 준 거라고 자랑한다(실제로는 내 돈 내고 내가 산다).
물론 그냥 줬다고 말하면 믿지 않을 비싼 물건들은 잠시 빌렸다고 하거나 선배가 팔아달라고 부탁했다고 둘러댄다. 아내가 절대 의심하지 않도록 진짜 물건을 돌려준 것처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그 물건은 중고나라에 팔아버린 것이지만.
◆송수근, 40대 이거 저렴한 거야
나는 신제품 구매보다 중고 구매를 선호한다. 하지만 아무리 중고라도 골프용품은 저렴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내의 눈치를 항상 보면서 산다. 따라서 최대한 저렴한 물건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판매자와 미리 입을 맞춰놓는다.
만약 구매하고 싶은 물건이 50만원짜리 중고 드라이버라면 판매자에게 미리 30만원을 온라인으로 송금한다. 그러고 나서 와이프와 함께 드라이버를 구매하러 가서 현금 20만원을 판매자에게 직접 전해준다. 이제부터 이 드라이버는 20만원짜리다.
◆한성찬, 40대 캐디 탓
아내와 함께 골프를 즐기기 때문에 서로 어떤 클럽을 사용하고 있는지 훤히 잘 안다. 따라서 클럽을 바꾸면 너무 금방 탄로 난다. 하지만 지름신을 물리치기에는 내공이 부족하므로 매번 새로운 클럽을 산다.
물론 못 보던 클럽이 백 안에 들어 있으면 아내에게 무조건 추궁당한다. 이럴 때 아주 가끔 사용하는 필살기가 있다. “어? 그 클럽이 왜 내 가방에 들어 있지? 지난주에 캐디가 드라이버를 바꿔서 넣었나 봐!”(연기력 중요)
◆익명, 40대 핫스폿
나는 장비병이 심한 편이다. 와이프는 ‘몸이 잘못이고 클럽은 잘못 없다’는 지론을 펼치며 장비병에 걸린 나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한다. 평소에 클럽을 몰래 사면 회사로 택배를 받고 자동차 트렁크에 보관한다. 하지만 눈치 빠른 와이프가 불시에 트렁크를 열어봐서 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 회사 동료와 점심을 먹다가 공유 창고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고 유레카를 외치며 회사 근처의 공유 창고를 검색해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공유 창고 덕분에 자동차 트렁크도 가벼워지고 사고 싶었던 클럽도 마음 편하게 구매하고 있다.
◆익명, 40대 투 백 작전
아내와 함께 골프를 즐겨서 절대적인 눈가림이 필요하다. 특히 아내 몰래 골프를 해야 할 때가 가장 문제다. 일단 기존 골프 클럽은 항상 집에 보관한다. 그리고 조금씩 용돈을 모아 새로운 클럽과 가방, 신발 등을 구매해서 회사로 받은 다음 단골 스크린골프장에 가져다 둔다.
와이프 입장에서는 내 골프백이 항상 집에 있기에 본인과 같이 골프를 가거나 접대 골프처럼 공식적으로 골프를 해야 할 때만 집에 있는 골프백을 가지고 나간다. 따라서 아내는 아직도 내가 야근을 핑계로 골프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연차를 내고 골프장에 갈 때도 알 수가 없다. 물론 골프장에도 정장을 입고 가서 골프웨어로 갈아입고 그날 입은 골프웨어는 코인 세탁소에서 세탁한다.
◆익명, 40대 완벽한 호흡
값비싼 골프 클럽을 사면 택배는 무조건 아버지 댁으로 보낸다. 배송 완료 메시지가 올 때쯤 아버지에게 연락을 드리고 대본을 작성한다. 그러고는 메소드 연기를 펼친다.
아버지 : 아들 주려고 하나 샀어.
아들 : 우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내 : 오~ 좋겠다. 여보~.
아버지의 마음이란 이심전심이랄까.
◆익명, 30대 행운의 남자
나는 평소에 즉석복권 한번 당첨되지 않지만 아내는 내가 행운의 남자라고 생각한다. 골프 월례회에만 다녀오면 행운상은 무조건 내 차지다. 또 물건을 구매할 때 판매자에게 이벤트에 당첨된 것처럼 보이려고 ‘축 당첨’이라고 박스에 붙여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다.
이 방법은 제품 포장이 허접하면 무조건 들통나기 때문에 반드시 판매자에게 포장에 신경 써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익명, 30대 스텔스 통장
결혼 후 아내와 통장을 합쳐서 비상금을 숨겨놓기 힘들다. 공인인증서까지 아내가 관리하다 보니 온라인 거래는 꿈도 꾸지 못하고 현금을 몰래 보관하다 아내에게 들키면 고스란히 아내의 지갑으로 들어간다.
어느 날 친구와 술자리에서 비상금 얘기를 나누다가 스텔스 통장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스텔스 통장은 인터넷으로 조회가 불가능하고 직접 은행을 방문해야만 입출금을 할 수 있는, 철저히 비밀이 보장되는 통장이다. 스텔스 통장을 만난 후 가정의 평화를 지키면서 골프용품을 사들이고 있다.
정리_김성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