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온 캐디 [Feature:1507]

북에서 온 캐디 [Feature:1507]

2015-07-23     엔디소프트(주)

사진_이종호

골프존카운티 안성W에서 열린 ‘제1기 북한이탈주민 캐디양성 프로그램 수료식’을 다녀왔다.

북한이탈주민 4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캐디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지난 3개월간 진행됐던 그들의 교육 과정을 돌아보고,

정식 캐디로서 처음 고객을 응대한 순간까지 함께 해봤다.

글_고형승

“언젠가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꿈입니다.”

에디터가 만난 세 명의 캐디는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벌어, 비록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북한에 있는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장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한민국 서민의 한 사람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에디터이기에 ‘내 꿈도 그렇다’고 말을 하려다 꾹 참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집’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라는 말임을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눈망울에 가득 찬 눈물을 보면서 순간 쓸데없는 농담을 던지지 않은 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은 우리와 거리상으로는 가장 가깝지만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나라임에 틀림없다. 평소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접할 수밖에 없는 북한의 실상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어린 꽃제비(거지)가 장마당(시장)을 전전하고, 강냉이죽도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이하는 아이들의 수도 헤아릴 수 없다. 그뿐인가? 탈북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건너가는 많은 수의 북한주민들은 중국 공안에게 붙들려 다시 북송된 후 처형당하고 있다. 중간에서 탈출을 돕는 브로커 등에게 성폭행을 당하기 일쑤고, 심지어 인신매매를 당해 인권이 유린되는 비참한 삶을 살기도 한다. 사선을 넘나들며 자유를 찾아 한국땅을 밟더라도 70퍼센트 이상의 북한이탈주민들은 사회소외계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골프존카운티는 남북하나재단과 지난해 12월, MOU를 체결하고 올해부터 ‘북한이탈주민 캐디양성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20여명의 북한이탈주민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지원했고 그 중 별도의 선발과정을 통해 최종 4명이 추려졌다. 3월2일부터 12주간의 교육을 거쳐 마침내 지난 6월 초 골프존카운티 안성W에서 수료식을 갖고 캐디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수료증을 받아 들고 한 참가자가 소감을 말할 때는 식장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오늘만큼은 정말 울고 싶지 않았는데 눈물이 나네요. 그동안 힘들었지만 많은 것을 알려주신 직원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끝까지 버틸 수 있게 용기를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 회사에 누가 되지 않게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또 다른 참가자는 “여기에 온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세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수료를 하게 된 게 정말 꿈만 같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처럼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힘들고 혹독했던 3개월의 교육 기간 수료식에는 4명이 아닌 3명만 참가를 했다. 바로 전날 1명의 교육생이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했다. 아마도 교육을 마치고 긴장이 풀리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긴 듯 했다. 지난 3개월 동안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골프’라는 생소한 스포츠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서 어쩌면 교육생들이 입는 하얀색 티셔츠(바람도 잘 통하지 않는다)를 벗고 정식 캐디들이 입는 빨간색 유니폼을 받아 들었을 때의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그녀들이 어떤 교육 과정을 거쳐왔는지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 한구석이 무언가 뾰족한 것으로 찌르는 듯 아프고 아려왔다. 영상 첫 부분에는 자기소개를 하는 부분이었는데 쭈뼛쭈뼛하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다들 머뭇거리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요?”라고 오히려 반문을 하는 것 아닌가. 하긴 북한에서 김 부자 찬양이나 자아비판은 해봤어도 자신을 남에게 소개하는 건 생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 영상은 캐디가 고객에게 응대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나 보다. 그런데 그 억양과 말투는 그야말로 ‘위대한 수령’을 찾을 때나 나옴직했다. 혹시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조그마한 북한 아이들이 평소 말투보다 한 옥타브 올려서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걸 들어봤는가. 바로 그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줄줄이 서서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안녕하십니까? 고객님”을 외치는데 그야말로 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그러고는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을 영상에 배경음악과 함께 담았다. 그동안 그녀들은 2인 1실의 기숙사에 살면서 골프에 대한 이론과 실습, 그리고 에티켓과 심지어 발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교육받으며 대한민국의 캐디로 거듭났다. 4명의 교육생들은 나이도 출신도 제각기 다르지만 ‘북한이탈주민 캐디양성 프로그램’ 1기생으로서 서로 끈끈하게 챙기고 다독여왔다. 처음 교육을 받았을 때 그녀들은 10년후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타임캡슐에 담아 골프장 나무 아래 묻었다. 그리고 거기에 ‘끝까지 해보자’는 문구를 적어 넣었다. 참가자 중 한 명은 “가끔씩 북한에서 쓰던 억양과 단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사람들이 웃곤 해요. 오히려 그렇게 안 쓰려고 의식하면 말이 더 꼬이는 것 같아요”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북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정말 생소했어요.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게 물론 쉽지는 않지만 특히 골프는 용어가 너무 어려워요. 모두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낯설고 발음도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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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을 탈출하는 주민이 늘어나면서 ‘탈북자’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97년 1월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기존의 ‘귀순’ 개념이 ‘북이탈’로 바뀌었으며 북한을 떠난 후 아직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들을 ‘북이탈주민’으로 규정했다. 2005년 우리나라 통일부는 ‘탈북자’라는 용어가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취지에서 새로운 명칭을 마련해 한국 거주 탈북자를 ‘새터민’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탈북단체들이 ‘새터민’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등 용어개념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르자, 2008년 11월 통일부는 가급적 ‘새터민’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북한이탈주민’이 탈북자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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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에 첫발 내디딘 4인방 에디터가 취재를 위해 인터뷰도 하고 사진촬영도 하면서 골프장측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교육생들의 얼굴과 이름이 노출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들 4명의 신분이 노출되면 북에 있는 가족이 위험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참으로 제한적인 취재에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북한에서 행해지는 요즘과 같은 공포정치 하에서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북한에서 넘어온 지 1년6개월밖에 안된 한 교육생은 중국에서 남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어렵게 한국 땅을 밟았지만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사회가 낯설었고 적응하기에도 어려웠다. 어떤 교육생은 그동안 동대문에서 장사를 했고, 또 다른 교육생은 정육점에서 일했다. 교육을 받으면서도 북에 있는 가족이 그립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한 참가자는 “가족 생각은 매일 하죠. 항상 보고 싶고 그리워요. 얼마 전에 어머니와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엄청 큰 회사에 들어왔다’고 하니, ‘내 딸은 잘할 거야’라며 다독여주시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저를 믿고 있는데 앞으로 힘든 일이 있더라도 잘해야죠”라고 말했다. 캐디란 어떤 직업인 것 같냐는 질문에 한 참가자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혼자서 라운드를 하는 동안 많은 일을 하잖아요. 한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해야 하고, 판단해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게 대단하잖아요”라고 답했다. 또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어려운 점이요? 과연 서비스의 끝은 어디까지인가를 늘 생각하게 만드는 게 가장 어렵죠. 사회 생활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겠지만 고객의 마인드를 이해하고 18홀을 마음 맞춰서 간다는 게 정말 힘들어요.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 고객의 눈높이를 제가 맞출 수 있을지 항상 걱정이에요.” 수료식을 마친 교육생들은 정식 캐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캐디로서 첫 고객들을 맞이했다. 물론 처음이기 때문에 골프장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직원을 상대하는 것이었지만 준비운동부터 그린에서 라인을 봐주는 것까지 큰 실수 없이 착착 진행해나갔다. 처음 필드에서 교육받았을 때의 어리숙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북한에서 왔다고 굳이 말하지 않으면 모를 것 같았다. “새로운 유니폼 잘 어울려요? 교육받을 때 입었던 옷보다 무척 시원하네요(웃음). 정식 캐디로서의 삶은 두려움 반 설렘 반이죠. 이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다른 친구들도 다 하는데 우리도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 하나로 버텨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에게 거는 기대가 있잖아요. 그 기대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지만 열심히 해서 욕은 먹지 말아야죠. 그래야 나중에 우리 후배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생길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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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임 남북하나재단 이사장 “통일 시대의 리더가 될 것”
북한이탈주민의 70퍼센트 이상이 20~40대 여성들이다. 정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사회자립’이기 때문에 그들을 취업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초경쟁사회이고, 북한이탈주민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익숙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다. 골프존카운티가 사회공헌의 일환으로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한 ‘캐디양성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제안해왔을 때는 정말 고마움에 눈물이 났다. 북한 출신의 캐디가 배출됐다는 건 마치 딸들을 양갓집에 시집 보내는 심정과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자기의 삶을 개척하려는 모습을 볼 때면 그 어느 때보다 감개무량하다. 앞으로 북한이탈주민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고객을 응대하다 보면, 골프존카운티 안성W만의 독특한 골프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부디 그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전문인들이 되었으면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은 과거 고구려인의 강인한 DNA를 갖고 있다. 탈북 과정에 비하면 그들에게는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닐 것이다. 통일 이후 북한에 골프장을 건설할 곳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때 골프장의 매니저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중에 통일이 돼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당당하게 ‘나 이렇게 성공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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