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구배, 우리나라 골프의 미래를 보다
허정구배 제66회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9월 3일부터 나흘간 남서울CC에서 막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회로 아마추어 골퍼가 출전 대상이지만 사실상 남자 주니어 선수들의 경연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나라 남자 골프 미래를 볼 수 있는 곳, 그 현장을 다녀왔다.
AM 5:30 어둠 속 빛나는 미래
태양이 어둠을 온전히 밀어내지 못한 오전 5시 30분. 남서울CC(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소재) 제1연습장은 볼 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회 출전을 앞둔 선수들이 어둠을 밝힌 전깃불 아래서 샷감을 끌어올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동행한 코치, 부모와 가끔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연습이 이어졌다.
연습장에서 100m 정도 올라가면 남서울CC 클럽하우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연습그린이 있다. 이곳도 출전 선수들이 한가득이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암묵적 동의 아래 일정 간격을 유지한 그들은 볼을 똑바로 굴리는 데 집중했다.
연습그린 뒤에는 코치와 부모가 자리했다. 선수만큼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주니어 선수에게 이 대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들 가운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골프 국가대표를 거쳐 코리안투어에서 활약한 권명호였다. 투어 생활을 끝내고 교습가로 전향한 그는 부산에서 주니어 선수를 육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도하는 선수 중 한 명이 이번 대회에 출전해 동행했다.
“다른 대회는 동행하지 않는데 허정구배는 워낙 큰 대회라서 함께 왔다. 아마추어대회로는 포인트가 가장 높기 때문에 국가대표 선발부터 스폰서 계약까지 많은 영향을 미친다. 부모와 코치 모두 선수만큼 긴장할 수밖에 없다.”
AM 6:30 우승을 향한 힘찬 티 샷
날이 완전히 밝은 오전 6시 20분, 첫 팀 선수들이 1번 홀과 10번 홀로 이동했다. 1번 홀 출발 선수들을 따라가자 간이 천막이 티잉 에어리어 뒤에 설치돼 있었다. 선수들은 이곳에서 스코어카드와 간식 등을 수령했고, 경기위원으로부터 주의사항을 전달받았다.
이번 대회는 ‘2019 대한골프협회 로컬룰 하드카드’에 대회 로컬룰을 추가해 적용했다. 경기위원은 그중 ‘원볼 플레이’를 강조했다. 같은 브랜드, 모델의 볼을 사용하는 것은 대회에 따라 다른데 이번 대회는 중요한 규칙 중 하나였다.
경기위원의 설명이 끝나자 선수들은 사용하는 골프볼을 확인하고 티 샷 순서를 정했다. 앳된 얼굴의 중고등 학생이었지만 표정은 전투를 앞둔 병사처럼 사뭇 비장했다. 그리고 6시 30분, 첫 번째 선수가 힘찬 티 샷으로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10분 간격으로 출발한 팀은 1번 홀과 10번 홀 각각 14팀, 총 28팀이었다. 성격에 따라 표정과 행동이 조금은 달랐지만 대부분 선수가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대회를 시작했다. 주니어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주목받는 선수일수록 표정이 밝고 당당했다.
선수들이 대회를 시작하는 그때 1번 홀 티잉 에어리어 뒤 언덕과 카트길에는 부모와 코치가 자리했다. 대회를 주관하는 대한골프협회(KGA)는 1~2라운드에 갤러리의 코스 입장을 막았다. 3~4라운드는 선수를 따라가며 경기를 볼 수 있지만 이틀 동안은 먼발치에서 바라봐야 했다. 그래서 선수들이 출발하는 1번 홀과 10번 홀 티잉 에어리어, 돌아오는 9번 홀과 18번 홀 그린 주변 언덕이 관전 구역이었다. 멀리서 플레이하는 아들을 보기 위해 망원경을 챙겨온 보모도 꽤 많았다. 대회에 출전한 어느 선수 어머니의 말이다.
“대회를 앞두고 밤잠을 설쳤다.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괜찮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멀리서 응원 밖에 할 수 없는 마음인데 그래서 더 떨린다.”
AM 9:30 차분함과 엄격함의 공존
대회가 치러지는 남서울CC 코스의 분위기는 묵직했다. 어린 선수들(간혹 성인 선수의 모습도 보였다)이지만 프로 못잖은 진지함으로 대회에 임했다. 캐디의 표정도 비슷했다. 한 명의 캐디가 선수 네 명을 도왔는데 방향과 장해물 위치, 그린의 경사 등 다양한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하느라 바빴다.
어느 캐디는 “허정구배 대회가 출전 선수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기 때문에 소홀할 수 없다”며 “성적이 안 좋은 선수가 경기 후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어서 신경을 바짝 써야 한다”고 넌지시 말했다.
경기위원도 바빴다. 선수들은 골프 규칙을 숙지하고 있지만 애매모호한 상황을 맞으면 어김없이 경기위원을 호출했다. 잘못된 판단과 선택으로 불이익을 받는 것보다 경기위원의 도움을 받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함께 플레이하는 선수들도 적극적인 개입보다 경기위원에게 맡기는 게 편한 눈치였다.
AM 11:30 다시 연습을 시작한 선수들
대한골프협회는 이번 대회의 1~2라운드 경기 시간을 4시간 48분으로 정했다. 늦어도 오전 11시 30분이면 6시 30분에 출발한 첫 팀이 경기를 끝내고 돌아온다는 뜻인데 어김없이 선수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표정에는 경기 결과가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부모와 코치는 표정을 읽고 함께 밝아지거나 어두워졌다.
스코어카드를 제출한 선수들은 식사를 하기도 했지만 바로 연습그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 중 뜻대로 되지 않은 퍼팅을 다듬거나 좋은 감각을 유지하려는 것 같았다. 그들이 연습하는 연습그린 가장자리에는 역대 대회 우승자 사진이 꽂혀 있었다. 확실한 동기부여였다. 선수들은 자신의 사진이 꽂히길 바라며 묵묵히 연습을 이어갔다.
PM 1:30 미래와 손잡기 원하는 브랜드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연습그린을 가득 채운 모습은 오전 6시 30분과 비슷했다. 연습에 열중한 선수들을 지켜보는 부모와 코치도 같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선수들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보며 부모와 대화하는 인물도 여럿 있었다. 바로 골프 용품 브랜드의 투어 담당자들이었다. 타이틀리스트, 미즈노, 핑 관계자가 1라운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타이틀리스트였다. 타이틀리스트는 주니어 선수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엘리트 주니어 육성 등 세 가지)을 구축해 운영 중이다. 훌륭한 선수 발굴과 육성으로 우리나라 골프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프로그램이다.
타이틀리스트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몇몇 주니어 대회에 퍼포먼스밴이 동행하는데 허정구배만큼은 투어밴이 직접 나선다. 프로 대회에 눈높이를 맞춘 투어밴은 최고 시설과 서비스로 선수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특히 투어밴을 방문하는 모든 선수에게 Pro V1, V1x 골프볼을 제공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그리고 클럽과 골프볼 선택 등 선수들의 궁금증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기도 했다.
타이틀리스트 리더십팀 한민철 팀장은 “허정구배 대회는 스타 선수의 등용문과 같은데 역대 우승자 중 투어에서 맹활약한 경우가 많다”며 “괜찮은 재목을 발굴해 지원하고, 장기적으로 후원 계약을 체결하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비바람 속 탄생한 우승자
이번 대회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서 치러졌다. 대회 첫날은 가끔 빗방울이 날렸지만 2라운드부터는 강도가 세졌다. 다행히 계획된 4라운드가 모두 치러졌고 최종합계 13언더파 275타를 기록한 박형욱(한체대 2학년)이 우승을 차지했다. 박형욱은 나흘 동안 72타, 70타, 67타, 66타라는 안정적인 플레이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마추어 대회에서 맹활약 중인 배용준(한체대 1학년)이 3타 차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아마추어 대회 3회 연속 우승은 실패했지만 포인트 순위로 오는 10월 제주에서 열리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더 CJ컵@나인브릿지 출전권을 획득했다.
밝은 우리나라 골프의 미래
“주니어 무대는 경쟁이 치열하다. 볼을 잘 치는 선수가 수두룩하다. 더욱더 체계적인 교육과 지원이 있다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남자 선수가 지금보다 많아질 것이다.”
대회장에서 만난 어느 코치의 말이다. 10년 이상 주니어 선수를 지도한 그는 우리나라 골프, 그중 남자골프의 미래를 밝게 전망했다. 지금은 여자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지만 남자 선수들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다른 코치와 부모의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여자 선수에게 집중된 시선이 남자 선수에게 옮겨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어느 선수 아버지의 말이다.
“남자 선수는 군대 문제가 가장 크다. 그리고 프로가 되더라도 활약할 대회가 많지 않다. 여자 대회는 차고 넘치는데 남자는 그렇지 않아서 걱정이다. 세계적인 선수가 더 많이 배출되려면 내공을 쌓을 무대가 그만큼 많아야 한다.”
현실을 꼬집는 아픈 말이다. 한두 사람이 꺼낸 말이 아니고 듣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대변했다. 이번 대회장에서 접한 어린 선수들의 경기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들은 밝은 미래를 위해 샷을 갈고 닦으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 노력을 지원할 시스템이 더욱더 체계적으로 구축된다면 우리나라 골프의 미래는 그만큼 밝아질 것이다.
[류시환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soonsoo8790@golfdige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