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도 ‘매너모드’ 해야 할 때 [GD 위클리슈]
‘신사의 스포츠’ 골프의 특징은 심판이 없다는 것, 그리고 현장에서 팬과 갤러리가 호흡한다는 것이다. 불과 몇 걸음 앞, 선수가 플레이하는 골프 대회장에서 매너 있는 갤러리가 될 수는 없을까.
“진짜 짜증 나. 왜 저래?”
차마 기사에 쓰지 못할 심한 말이 들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라운드를 마치고 스코어카드를 제출하러 가던 선수였다. 어린 선수 입에 욕을 담게 한 사람들은 바로 갤러리였다. 경기 도중 소음 때문에 많이 속상한 눈치였다. 기자와 눈이 마주친 선수는 깜짝 놀라더니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저 선수, 어떻게 저런 심한 말을 하지’ 하던 생각도 잠시, ‘오죽하면 그러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일부 ‘진상 갤러리’ 때문에 골프 대회장이 울상이다.
#1 한 선수가 티 샷을 하자 티잉 에어리어 바로 뒤쪽에 서 있던 갤러리가 셔터 소리를 내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샷을 망친 선수는 한숨을 쉬었다. 이를 본 관계자가 사진 찍지 말라고 제재했다. 그러자 그 갤러리는 “네가 뭔데 사진도 못 찍게 하냐”고 되레 욕했다.
#2 선수가 버디 퍼트를 잡자 이를 보던 팬클럽이 일제히 “나이스 버디”를 외치며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다른 선수가 퍼팅하려는 찰나 팬클럽 일부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다음 홀로 이동했다. 퍼팅하려던 선수는 움직임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내 플레이에는 관심 없나 하는 불편한 기분 속에서.
#3 선수가 경기에 들어가면 부모조차 말을 잘 걸지 않는다. 특히 챔피언 조에 속했다면 더욱 그렇다. 그만큼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갤러리는 경기 중인 선수에게 다가가 당당하게 말을 건다. “저, 팬인데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안 돼요?”
#4 한 선수의 티 샷이 카트 도로를 맞고 근처 러프에 멈춰 섰다. 그 자리에 있던 갤러리는 플레이 중인 공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렸다. 결국 선수는 리플레이스를 해야 했다. 원래 공이 착지한 곳보다 라이가 좋지 않아 피해를 봤지만, 선수는 갤러리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5 선수가 예상치 못한 실수를 범했다. “아이고…” 이를 본 갤러리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들리는 “쯧쯧” 혀 차는 소리. 실수에 당황한 선수는 혀 차는 소리가 귀에 맴돌아 마음을 다잡기 쉽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엔데믹으로 전환되면서 골프 대회에 갤러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갤러리가 많기로 유명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NH투자증권레이디스챔피언십은 올해 누적 갤러리가 3만 명을 넘었다. 골프 관계자 10명 중 8명은 갤러리 얘기가 나오면 한숨부터 뱉는다.
캐디가 대놓고 ‘스윙하기 전에 미리 셔터를 누르라’고 안내할 정도다. 한 선수는 “스윙할 때 셔터 소리 나는 건 이제 신경도 안 쓰인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신경이 안 쓰이는 게 아니라 이골이 난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선수가 다음 홀로 이동하거나 대기 중일 때 사진 한 장 찍자고 다가오는 사람도 있고, 선수가 카트 도로 쪽에 공이 떨어져 백을 잠시 세워두면 슬쩍 클럽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 또 텀블러를 흔들어 찰랑찰랑 얼음 소리를 내는 등 자신에게 소음이 나는 걸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다.
선수와 부모는 ‘인신공격’에 골머리를 앓는다. 일부 갤러리가 코스에서 “쟤는 돼지 같다”, “실제로 보니 얼굴이 이상하네” 하고 수군거렸다. 선수 주변에는 가족이나 지인이 늘 있다. 갤러리의 속삭임은 그들도 모두 듣는다. 이상하게도 그런 말은 귀에 잘 들어온단다. 간혹 근처에 있던 선수가 직접 듣기도 한다. 실제로 올해 한 선수의 팬이 상대 선수의 외모를 비하했고, 이로 인해 선수 간에 싸움이 난 적도 있다.
이 모든 건 대회 중에 일어난 일이다. 선수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실수했을 때 혀 차는 소리다. ‘최악’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선수는 “선수도 18홀 플레이를 하다 보면 실수할 때가 있지 않나. 실수한 순간 당황하는데 옆에 있던 갤러리가 혀를 차거나 ‘저것도 못해?’ 하는 소리가 들리면 실수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이 간다. 멘탈 잡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진상’은 수많은 갤러리 중 극소수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선수들의 스윙을 직접 관전하다 보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평소 좋아하던 선수를 보면 누구나 팬 서비스를 받고 싶다. 실수로 ‘매너모드’ 설정을 깜빡할 때도 있다.
문제는 ‘이기심’과 ‘타이밍’이다. 갤러리 대부분은 골프를 즐기는 사람이다. 골프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편하자고 혹은 귀찮아서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해 급증한 골프 인구가 갤러리 에티켓도 모르고 대회를 보러 오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래도 최근 골프계에 팬클럽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갤러리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대형 팬클럽에는 소위 ‘집행부’가 있다. 회장, 현장 지휘 담당, 응원단장 등 직책도 있다. 대회장에 방문한 팬의 질서를 관리하고, 마샬 캐디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또 선수 먼저 이동할 수 있게 질서를 잡아주기도 한다. 동반 선수의 플레이에도 응원을 보내거나 에티켓을 모르는 갤러리에게 문화를 알려주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선수라면 소음을 이겨내야 하는 것 아니냐. 야구나 축구는 관중이 소리 지르고 술도 마시는데 골프만 유난이다.” 물론 선수도 현장을 찾는 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어느 정도의 소음은 이겨낼 멘탈을 지녀야 한다. 스포츠 인기는 거품 같아서 언제 사그라들지 모른다.
하지만 골프가 관중을 ‘갤러리’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야구나 축구와 달리 골프는 팬이 바로 앞에서 플레이를 관람한다. 분위기가 워낙 조용해서 갤러리에게는 사소하게 작은 소음일지라도, 선수 귀에는 날카롭게 꽂힐 수 있다. 특히 스윙할 때는 더욱 그렇다. 갤러리의 소음 때문에 티 샷을 실수하는 선수가 대회마다 생겨난다.
한 선수는 “물론 어느 정도의 소음은 이해한다. 어떻게 다 통제하겠나”면서도 “갤러리 소음 중에 귀에 꽂히는 게 있다. 그 소음은 마치 파리 소리 같다. 주변에 파리가 날아다니면 시끄럽진 않아도 귀에 앵앵 맴돌지 않나. 그런 느낌이다. 물론 프로 선수로서 이겨내야 할 부분이지만, 갤러리 분들도 배려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어느 날, 취재차 코스를 돌기 위해 코스를 나섰다. 한 중년 부부가 옆에서 들뜬 표정으로 어느 선수의 플레이를 보러 갈지 얘기를 나눴다. “아 참, 여보, 핸드폰 매너모드로 해놨지? 소리 내면 안 돼, 여기는.” “그럼 당연하지. 한두 번 와?” 대회장에 오는 갤러리가 모두 이 부부와 같다면 어떨까. 선수, 관계자, 갤러리 모두 눈살 찌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진=KLPGA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