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의 끝없는 추락 [Feature :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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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의 끝없는 추락 [Feature : 1708]
  • 김기찬
  • 승인 2017.08.2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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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의 끝없는 추락 [Feature : 1708]
WHAT NOW, TIGER? 타이거의 끝없는 추락

한 때 모든 해답을 알고 있었던 한 선수에 대한 여섯 가지 의문. 글_제이미 디아즈(Jaime Diaz)



한 때 무적인 것처럼 보였던 타이거 우즈는 이제 세상에 그런 존재는 없다는 걸 말해주는 가장 막강한 증거로 전락했다. 다른 모든 살마처럼 그에게도 이제 남은 건 희망뿐이다. 그런데도 2017년 시즌을 맞은 팬들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어느새 마흔한 살이 된 메이저 대회 14승 챔피언이 15개월의 휴식을 끝내고 대회에 복귀했으며 2014년 3월 이후 세 번의 허리 수술을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와 유연한 리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5주에 걸쳐 네 번의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의욕적인 일정으로 시즌을 시작한 우즈도 희망에 부푼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토리파인스에서 열린 첫 대회에서 컷 탈락하고 두바이에서는 첫 라운드에 77타를 기록한 후 허리 경련을 이유로 기권하자 희망은 고통으로 변했다.

우즈가 내리 다섯 번째 불참하는 메이저 대회였던 마스터스의 챔피언 만찬에서 우즈는 잭 니클라우스에게 허리 통증이 심해진다고 말했다. 니클라우스는 우즈에게 자신의 오랜 물리치료사를 찾아가보라고 권했다. 우즈는 피트 에고스큐에게서 한 차례 치료를 받았지만 나흘 후 척추 유합 수술을 받았다. 이제는 2018년 마스터스 때에야 참가를 고려라도 해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이것만으로도 절망적이건만, 전몰장병 기념일 새벽 3시에 플로리다 경찰은 우즈의 주피터 아일랜드 집 근처의 대로변에 시동이 켜진 채로 정차해 있는 그의 차를 발견했다. 한쪽 깜빡이도 켜진 상태였고 우즈는 운전석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우즈는 음주 운전 혐의로 체포됐다. 헝클어진 모습으로 찍힌 상반신 사진과 음주 측정 테스트에 실패하는 경찰의 동영상이 공개되자 그는 대중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대중의 반응은 그가 2009년 추수감사절에 자동차로 집 앞의 소화전을 들이받고 뒤이어 여러 건의 혼외정사 전력이 드러났을 때와 비슷했다. 이번에 우즈의 2015년형 메르세데스는 몇 군데가 움푹 파였고 운전석 쪽의 타이어 두 개는 펑크가 났다. 그는 경찰에서 통증 치료제인 바이코딘과 진정제인 재낵스가 포함된 처방 약을 섞어서 먹었다고 진술했다. 나중에 발표한 사과문에서 그는 “처방 약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에 적극 협조한 것으로 보이는 우즈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은 음주 측정치가 0.000이었다는 사실로 뒷받침됐다. 골프계는 위로와 응원을 표명했다. “그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건강을 기원한다.” 니클라우스는 말했다. “그가 곤경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다시 골프를 하게 되길 희망한다. 그에게는 많은 사람의 응원이 필요하다. 나도 함께 하겠다.”  우즈는 미리 준비한 사과문을 통해 잘못을 시인했다. “제 행동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으며 모든 것은 순전히 제 책임입니다. 우리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팬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저 역시 더 나은 모습을 기대합니다.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제가 지닌 모든 역량을 기울이겠습니다.” US오픈이 끝나고 그다음 날인 6월19일에 우즈는 그 방향으로 첫발을 옮겼다는 사실을 트위터를 통해 공개했다. “저는 현재 투약 관리를 위한 전문적인 도움을 받고 있으며 허리 통증과 수면 장애와 관련해서도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큰 응원과 이해를 보내준 모든 분, 특히 팬들과 투어의 선수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그가 있는 곳을 밝힐 재량은 내게 없지만 그는 현재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우즈의 에이전트인 마크 스타인버그(Mark Steinberg)는 ESPN.com에서 이렇게 밝혔다. “타이거는 신체적으로 극심한 통증을 견뎌왔다. 그것이 불면증과 수면 장애로 이어졌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돼왔다.” 하지만 우즈는 그 어느 때보다 알 수 없는 미스터리가 됐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부상과 표면적인 회복과 관련해서 반복된 우즈의 발표는 대단히 회의적인 ‘좀 더 두고 보자’는 태도를 불러일으켰다. 15개월 동안 휴식을 취했지만, 작년 12월에 마침내 자유롭게 스윙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우즈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전과 달라진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앉아 있게 되었는데 그만큼 상황이 많이 호전됐다.” 하지만 다음 달에 토리파인스에서는 상황이 나빠졌고 두바이에서는 더 열악해졌다. 처음에 우즈는 “전혀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스타인버그는 경련이 신경 문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우즈는 계속해서 상황의 심각성을 축소하고 있지만 우즈의 대회 복귀 가능성은 사라졌다. 마스터스를 두 번 연속 불참한 우즈는 4월18일에 새 코스의 개장 간담회에 참석해서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바로 그다음 날 댈러스에서 척추 유합 수술을 받아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수술은 잘 끝났고 이번 수술로 허리의 경련과 통증이 줄어들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우즈는 성명서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회복된다면 일상생활에 복귀해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프로 대회에도 참가하면서 너무나 오랫동안 싸워온 이 통증이 사라진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스타인버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번 수술이 나쁜 나날을 사라지게 해줄 것으로 희망한다.” 5주 후에 우즈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지속적인 통증으로 인해 수술을 받아야 했다는 글을 올렸다. “이제 더는 예전 같은 통증 속에서 살 수 없었다. 우리는 수술 외적으로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시도했는데 아무 효과가 없었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었지만 통증은 언제나 가시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눕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뭘 해도 신경통이 왔고 막다른 곳에 다다른 심정이었다.” 그의 글은 계속됐다. “허리에 척추 유합 수술을 받은 지 이제 막 한 달이 지났다. 느낌이 얼마나 좋아졌는지는 표현하기 힘들다. 순식간에 신경이 안정됐다. 이런 기분은 여러 해 만에 처음이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내가 말했듯이 통증이 사라진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나흘 후에 우즈는 진통제를 복용했고 그건 심각한 사고로 이어졌다. 많은 의문이 남아 있지만 일단 여섯 개를 추려보았다. | 1 타이거의 수술은 낙관할 이유일까 아니면 또 다른 후퇴일까? | 전방 요추체간 유합술이라는 말이 끔찍하게 들리고, 척추를 자르고 붙이는 걸 상상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겠지만, 사실 이 수술은 골퍼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증상을 제거해줄 때가 많다. 그건 바로 신경통이다. 메이저 챔피언 중에도 비슷한 수술을 받은 사람이 세 명 있는데(래니 왓킨스, 리 트레비노, 레티프 구센) 전부 그 수술을 최후의 수단이라고 여겼지만, 다들 즉시 신경통이 가시면서 새로운 의욕으로 게임에 복귀했다. 왓킨스와 트레비노는 정규 PGA투어 활동을 마친 후에 수술을 받았지만(왓킨스는 58세, 트레비노는 64세에) 2001년과 2004년 US오픈 우승자인 구센은 마흔네 살이던 2012년에 디스크 치환 수술을 받았다. “당시에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골프를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구센은 2009년을 끝으로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허리 통증이 없다. 동작의 폭이나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고 샷을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쇼트 게임과 퍼팅은 예전만 못하지만 그건 허리와 관계가 없다.” 우즈도 ‘즉각적인 신경통 완화’를 언급했다. 만약 이번 수술과 재활을 통해 그가 다시 한번 자유롭고 빠르게 스윙할 수 있게 된다면 왓킨스와 트레비노 그리고 구센은 모두 그가 다시 우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았다. “내가 예측해보자면, 그는 번쩍이는 영광 속에 복귀할 것이다.” 트레비노는 세 명 중에서도 가장 낙관적이었다. “그는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몸 상태를 회복해 샷을 하면서도 통증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 그는 너무나 행복해서 이전보다 더 맹위를 떨칠지도 모른다.” | 2 더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진통제는 왜 먹은 것일까? | 우즈는 처방받은 약을 잘못 섞어서 먹었다고 주장했다. 바이코딘과 재낵스가 섞여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약물 성분이 발견되는지는 검사 결과를 기다려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2009년 추수감사절 때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엘린이 경찰에게 우즈가 바이코딘과 수면제인 앰비엔을 처방받았다고 말했던 것이 다시 부각됐다. 그는 이번에도 통증이 없다고 말했다. 스타인버그는 ESPN.com에서 우즈가 통증이 없다고 토로해놓고 지속적인 통증에 따른 증상을 해결해줄 처치가 필요했던 것에는 전혀 모순될 게 없다고 말했다. “이건 2 더하기 2의 상황이 아니다.” 그는 말했다. “이건 그만큼 복잡한 상황이다. 만약 누구라도 그렇게 오랫동안 극심한 통증을 겪었다면…. 타이거는 어떻게 살지, 어떻게 생활할지, 그 방법을 고민해왔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처했다. 나는 그가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즈가 허리와 무관한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해 통증을 해소해야 했던 건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허리 수술을 받은 선수들은 신경통은 사라졌어도 수술의 절개와 전반적인 과정으로 인해 한 일주일 정도는 욱신거렸다고 말했다. 우즈의 한 지인에 따르면, 수술 한 달 후이자 체포되기 직전에 우즈는 허리 부분의 절개로 인해 여전히 아프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우즈는 2008년에도 바이코딘 복용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전방십자인대 파열로 인해 극심한 통증 속에 US오픈을 치렀다. 당시 그의 코치였던 행크 헤이니에 의하면 우즈는 그해 마스터스 도중에도 그 약을 복용했다. 우즈는 2위를 차지했지만 퍼팅이 좋지 않았다. 우즈는 바이코딘이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게 됐고 토리파인스에서는 그 약 대신 모트린 아니면 애드빌을 먹었다. 우즈가 체포됐을 때 대부분의 관계자는 우즈에게 약물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삼갔다. 하지만 폴 에이징어는 좀 더 솔직했다. “그는 허리 수술을 여러 번 받았고 무릎 수술도 받았으며 아킬레스에도 문제가 있었다. 통증이 엄청났다. 만약 빠졌다면, 타이거는 중독성이 매우 강한 약물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 3 골프를 너무 오래 쉰 걸까? | 우즈는 2013년에 5승을 거뒀지만, 그 후로는 기껏해야 파트타임 골퍼 수준에 머물렀다. 그리고 2015년 8월 이후에는 단 세 대회에만 출전했다. 장기간 휴식은 제아무리 위대한 선수라 할지라도 보통은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보비 존스는 28세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후 1930년에 은퇴했지만, 4년 후 복귀해서 마스터스의 주최자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존스는 첫 라운드 두 번째 홀에서 퍼팅 스트로크가 뻣뻣하고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존스는 지금의 14번홀인 다섯 번째 홀에서 카메라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거슬려서 백스윙을 중단했고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게임에서 어떤 요소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걸 알았다.” 찰스 프라이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의기소침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로 인해 그의 신경은 그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이 아니라 방해가 되는 방식으로 작용했다.”  그런가 하면 1975년에 낙뢰에 맞은 후 다시 복귀한 트레비노는 자신의 실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암 투병과 화학 치료로 인해 거의 2년간 투어를 떠났던 에이징어도 예리한 면모를 잃어버렸다.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은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인해 1996년 시즌을 거의 통째로 쉬었다. 1999년 마스터스에서 우승을 거두긴 했지만, 부상과 부재는 위대함을 향해 꾸준히 상승하던 흐름을 꺾어놓았다. 심지어 벤 호건도 거의 죽을 뻔했던 1949년 초의 자동차 사고 이후 1953년까지 출전한 아홉 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6승을 거뒀지만 두 번 다시 1948년처럼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우즈는 속도와 파워에서 뭔가를 상실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불가피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상쇄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선수의 요건일 것이다. 문제는 우즈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약해졌는가이다(그리고 어쩌면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니클라우스가 말했듯이, “그처럼 오랫동안 부상을 겪을 경우 그 사람이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 4 복귀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걸까? | 1900년 이후 마흔두 살이 넘어 메이저 대회에서 한 번 이상 우승한 골퍼는 단 한 명이다. 줄리어스 보로스가 마흔세 살에 1963년 US오픈 그리고 마흔여덟 살에 1968년 PGA챔피언십을 차지했다. 호건은 마흔 살이던 1953년에 3승을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니클라우스는 마흔 살에 두 번 그리고 마흔여섯 살에 자신의 열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뒀다. 해리 바던이 마지막 두 번의 디오픈에서 우승한 건 마흔한 살과 마흔네 살 때였다. 마크 오마라는 유일한 2승을 마흔한 살이던 1998년에 기록했다.  우즈에게 유리한 기록이라면 모든 종목을 막론하고 엘리트 선수는 정상에 더 오래 머무른다는 것이다. 반면 불리한 점은 과도한 마모(단순히 부상에 따른 것만이 아닌 그가 10대 중반부터 큰 무대에서 겪은 치열한 경쟁에 따른 마모)가 골퍼로서 실제보다 그를 더 나이 들게 만들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 5 이번의 공개 망신은 타이거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까? | 공인 중에 아마도 가장 빠르고 가파르게 추락한 이후 지난 8년 동안 엄청난 자제력으로 그 여파를 견뎌온 우즈는 다시 한번 비슷한 타격을 입게 됐다. 그의 자녀들은 이제 세상이 아버지에 대해 떠들어대는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광고 계약도 타격을 입을 게 분명하다. 한때 연간 1억 달러였던 코스 외 수입은 약 3500만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나마 남아 있는 전성기의 자신감과 숙명의 분위기를 여기서 더 잃어도 괜찮을까? 하지만 우즈는 2009년 이후에 그런 감정에 단련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혐의가 줄어들고 대중도 차분함을 되찾으면 체포의 이미지가 희미해질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2009년에 역전된 대중의 반응(이미 충분히 상처 입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대중적인 혐오감이 확산하면서)이 우즈가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줬을 수도 있다. 그가 속으로 어떻게 느끼든 또는 소셜미디어가 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갤러리가 보여주는 격려와 위로는 그를 지탱해줬다. “어마어마한 지지를 보여준 팬들에게도 고맙다. 그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됐다.” 그도 최근 수술 이후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암울한 시기를 통과하면서 우즈는 이전의 재능을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으면 스포츠계가 온통 자신에게 매료되고, 공공연한 잘못이나 망신은 거의 다 잊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6 다른 선수들은 진심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을까? | 작년 한 해 동안 사교성이 강화된 타이거의 새로운 면모를 놓고 많은 얘기가 오갔다. 라이더컵에서 부단장을 맡았을 때도 자신이 아는 것을 아낌없이 가르쳐준다며 칭찬이 쏟아졌다. 그는 소셜 미디어도 시작했다. 하지만 일부는 우즈가 친구라고 부르기도 했던 몇몇 동료 선수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결과 그는 여전히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그나마 메달리스트골프클럽이나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인 우즈 주피터에) 고립된 삶을 살고 있으며, 생각을 털어놓지 않고 신뢰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우즈의 별난 버릇 하나는 선두를 다투는 선수에게 응원을 보내고 행운을 비는 문자를 보내는 것인데 그런 다음 몇 차례 문자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를 여러 해 동안 지켜봤고 골퍼로서 동료애를 느끼는 나이 든 선수들은 코스 밖에서 우즈와 교우한 적이 혹시 있었더라도 극히 드물었다고 털어놓았다. 젊은 선수들(어린 시절에 우즈를 보면서 꿈을 키우기도 했던) 그리고 여전히 그와 플레이를 함께 하는 드문 기회를 누리는 이들은 다른 베테랑 선수들에게서 받는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필 미컬슨은 훨씬 더 사교적인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선수들은 이제 일반적인 농담 한두 마디를 제외하면 거리를 유지하는 골프계의 아이콘을 대체로 슬프게 바라볼 뿐이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의 전형이다. 어려서부터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 스타덤에 오르고 골프계의 얼굴이 된 것이다.” 라이언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내성적인데 그건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 우즈에게는 쉽게 생각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얼마 전에는 그러잖아도 힘겨운 삶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어쩌면 한때는 도피처였지만 이제는 부담이 되어버린 골프로 복귀하기 위해 전념하는 것이 새 출발을 위한 베이스캠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제는 골퍼로서 해야 할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많다. 하지만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졌다. 올해 12월이면 마흔두 살이 되는 우즈에게 이보다 더 사무치는 말은 없을 것 같다. 희망은 아침 식사로는 좋지만 저녁 식사로는 나쁘다. 보조 취재_브라이언 웨커(Brian Wacker)  

어느 조력자의 고백

알리부터 피트로즈 그리고 보비나이트와 타이거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로잡은 사람들. 글_톰캘러핸(Tom Callahan)

얼마 전, 갓길과 연민을 건드린 그 사건 이후 나는 한동안 타이거 우즈의 ‘조력자들’을 수소문했다. 도저히 찾을 수 없겠다고 포기하려는데 모퉁이를 돌다가 느닷없이 그들을 발견했다. 그건 나였다. 우리였다. 아닌 게 아니라 바로 당신이었다. 우리는 모두 조력자였다. 6300만 명의 미국인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독불장군이 되어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조금 더 많은 미국인들이(주로 따질 경우 10개 주가 적었지만) 힐러리 클린턴에게 힘을 실어주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당과 함께 존 F. 케네디가 한 말(“횃불은 새로운 세대에게 넘어갔다”)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걸 구세대에게 다시 건네줬다. 야심은 말할 것도 없고 돈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왕년에 나는 O. J. 심프슨의 강력한 조력자였다. 스포츠 기자들이 자신의 전화를 받아주는 선수에겐 많은 걸 눈감아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신시내티의 한 호텔 방에서 기자들이 그를 은퇴한 짐 브라운에 비교하던 날부터 그를 좋아했다. O. J.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누가 최고인가요? 나 아니면 브라운?”  “게일 세이어스.” 내 대답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브라운은 웃지 않았을 것이다. 심프슨은 그 웃음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편 브라운은 수비수를 따돌리는 실력만큼이나 여자를 폭행한다는 세간의 추측을 잘 털어냈다.  나는 오하이오 주립대 시절의 우디 헤이스와 인디애나 시절의 보비 나이트를 알고 있었다. (나는 나이트와 함께 골프를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도 알고 있었다. 아마 모두가 그랬을 걸로 생각한다. 그들은 큰일은 제대로 하면서 작은 일을 그르쳤다. 우디는 사이드라인의 거리 측정 요원을 폭행한 데 이어 벅아이스의 쿼터백인 아트 슐리터의 패스를 가로챘다는 이유로 찰리 바우먼이라는 클렘슨의 미들가드를 때려눕혔다. 슐리터는 빅텐(미국의 대학미식축구 경기연맹)의 연보에 기록된 최악의 이단아였다. 그렇게 우디는 사라져갔다. 머리를 다듬으라고 해놓고는 가구를 집어 던질 정도로 전례 없이 제멋대로였던 나이트도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진 것처럼 퇴장했다. 그래도 그런 행실을 지켜보는 건 재미있었다. 피트 로즈도 마찬가지였다. 피트는 어찌 된 영문인지 자신이 속한 세대를 건너뛰었다. 로즈는 양키스의 명예에 전당에 오른 웨이트 호이트의 일화를 슬쩍 가져다가 마치 베이브가 욕조에서 거구를 일으켜 세운 후 흰 테리 천의 가운을 꺼내 입을 때 바로 거기에 서 있었던 것처럼 베이브 루스의 이야기를 떠벌렸다. (“왼쪽 가슴의 주머니에 빨간색으로 BR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어.” 피트는 손끝에 베이브의 이니셜이 만져지는 것처럼 말했다.)

경기 2시간 전에 더그아웃에 앉아 있던 로즈는 너클볼 투수인 필 니크로가 외야에서 달리기하는 걸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필 니크로한테서 안타를 71개 쳤고 조 니크로한테서는 41개를 쳤어. 젠장, 니크로 부인한테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단세포적인 사람을 보면 우리는 서글프기보다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 인종차별과 베트남전쟁 그리고 암살의 시대였던 1960년대의 시금석인 무하마드 알리는 이슬람 국가 운동의 지도자인 엘리야 무하마드가 1975년에 세상을 떠난 후로 인종차별과 관련된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내가 알기로는). 그리고 그 전에 했던 말은 본의가 아니었다. 그의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의 눈동자에서 오로지 사랑만 발견했다. 우리가 그를 열렬히 응원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흑인이 흑인에게 위협이 되는 경우보다 흑인이 백인에게 위협이 될 때가 더 많다.” 어느 날 밤에 그는 자이르의 콩고 강가에서 내게 말했다. 그건 인종차별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고 순전히 내가 조지 포먼을 1위로 꼽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늘 틀려.” 알리는 나중에 흔들리는 시선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그는 훌륭한 친구였다.” 어니 엘스는 2009년에 에스컬레이드 자동차가 소화전을 들이받았을 때 타이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훌륭한 친구. 당신도 그를 알지 않았나.” 글쎄, 그가 훌륭한 친구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훌륭한 선수이기는 했다. “강인한 사람이면서도 수줍고 친절한 친구지.” 엘스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많은 부담을 느낀다는 게 눈에 보였다. 얼은 그에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주문했고 그는 그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지.” 내게는 최고의 조력자인 얼 우즈가 특유의 능변으로 이렇게 말하는 오래된 테이프가 있다. 그걸 보면 거짓말의 대가인 마크 스타인버그가 믿음직해 보일 정도다. “타이거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릴 때 한 번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병이 났을 정도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한쪽에 있던 내가 반박하는 소리가 들린다. “얼, 그는 PGA투어 최고의 (삐리리) 거짓말쟁이예요.” 얼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니가 7년 전에 한 말 중에는, 그 후에 나왔던 거의 모든 진단과 달리, 지금까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발언이 있다. “그가 마스터스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게 될까요?” 내가 물었다. “우승을 다투겠지.” 그가 말했다. “정말이죠?” “그는 5위를 할 거야.” (그는 4위를 했다.) “하지만 우승은?” 어니가 말했다. “어림없어.” “어니, 그가 5위를 할 수 있다면 우승도 할 수 있어요.” “아니, 죄책감이란 게 있거든. 양심 말이야. 자존감이 없이는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어.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나도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예전과 같을 수는 없을 거야.” 예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타이거가 네 살 때 얼과 쿨티다는 아이를 데리고 캔자스의 친척 집을 방문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동생들을 키웠던 얼의 큰누나 해티 벨은 마당에서 타이거에게 미식축구공을 던져주었다. “내가 잘 보고 있으마.” 그녀는 장을 보러 나가는 동생 부부에게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공을 내려놓고 타이거를 안아 올렸다. “쟤들이 아이를 충분히 안아주지 않는 모양이야.” 그녀는 다른 여동생에게 말했다. “이 슬픈 눈을 좀 봐.” 그 머그 샷을 봤을 때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슬픈 눈을 좀 봐.





허무하게 중단된 세기의 추격전

니클라우스의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을 뒤쫓던 타이거의 추격전을 다시 보고 싶다.  글_데이브 셰들로스키(Dave Shedloski)

골프계에서 대변혁의 시기는 많지 않았고 마법 같던 때는 더 드물다. 아널드 파머의 카리스마가 텔레비전과 결합하면서 골프의 인기가 치솟았던 1960년대 초보다 더 중요한 시기는 아마 없을 것이다. 순수하게 개인적인 의견이기는 하지만, 2008년 US오픈 이후에 다른 상황이 벌어졌더라면 더 중대한 사건이 골프계의 근대사를 빼곡하게 채웠을지도 모른다. 그 대회에서 타이거 우즈는 전방십자인대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며칠 후 무릎 재건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로코 메디어트를 플레이오프에서 물리치고 자신의 열네 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우승으로 6연승과 열네 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열한 번의 톱3 기록을 세우며 호건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때 타이거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었다. 골퍼의 선수 인생에서 스위트스폿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잭 니클라우스의 프로 메이저 대회 18승 기록이 아무리 상징적이어도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니클라우스도 서른두 살 이후에 일곱 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추가했다. 필 미컬슨은 서른세 살에야 메이저 대회 첫 승을 거뒀고 호건이 첫 승을 기록했을 때는 서른네 살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운동선수가 골퍼였던 건 아마 역사상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4대 메이저 대회마다 타이거가 우승할 때면 네 번째 라운드에서 유례없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니클라우스의 기록 경신을 눈앞에 둔 타이거가 골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그 황금의 시기는 실현되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 8월10일에 퀘일홀로클럽에서 제99회 PGA챔피언십이 열려도 우즈의 모습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성적인 허리 부상으로 그는 여덟 번째 내리 메이저 대회에 불참하고 있다. 그리고 2008년 US오픈 이후로 열네 번 메이저 대회에 불참했고 여섯 번은 컷 탈락했다. 부상이 그의 명성을 앗아간 건 사실이지만, 혼외정사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중의 조롱과 비난이 쏟아졌던 2009년 말의 그 충격적인 사건이 걸출했던 그의 경쟁력을 무디게 만들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즈는 2008년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스물두 번 3위권을 기록했다. 그리고 추문이 터진 후에는 한 번에 그쳤다. “거의 골프를 도둑맞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고 그 추격전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중단됐다는 사실이 여전히 놀라울 뿐이다.” PGA챔피언십 우승 전적이 있는 폴 에이징어는 말했다. “우리는 모두 10년 후를 내다보면서 그가 이 부담감을 어떻게 견뎌낼지 예의 주시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가 보여준 플레이는 그가 해낼 수 있다고 믿을 만했다. 모든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니클라우스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나도 보고 싶었다.” 황금곰은 말했다. “자신의 기록이 깨지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만약 그가 해냈다면 나는 제일 먼저 그에게 악수를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그가 뭔가를 해낼 때마다 내 이름이 그의 이름과 나란히 언급되는 게 즐거웠다. 내 존재가 계속 일깨워졌다. 더 중요한 건 골프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부디 그가 다시 건강해지길 바라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여전히 그가 그 기록에 도전할 거라고 믿는다.” 올해 일흔일곱 살인 니클라우스는 자신이 메이저 대회 기록을 뛰어넘었던 보비 존스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로 남아 있다. 자신의 기록을 따라잡으려는 타이거의 추격전에 맥락을 더해줄 수 있는 니클라우스의 능력은 이 모든 것의 의미를 무한히 증폭시켜줄 것이다. 현재 골프계의 상황이 밝다는 데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지금의 차세대 선수 중 몇몇은 위대함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독보적이고 마법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던 그를 이어 제2의 타이거가 될 선수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가 발산하는 기운은 정말 특별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코스에서 다시 보고 싶다.” 제이슨 데이는 2014년에 우즈가 완전히 물러난 후로 세계 1위의 자리를 차지한 몇몇 선수들 가운데 한 명이다. “오거스타 9번홀에서 그가 파 퍼팅에 성공했을 때 함성이 터져 나왔던 게 기억난다. 마치 그가 페어웨이에서 홀아웃을 하기라도 한 분위기였다. 바로 그게 타이거 효과였다. 그는 단순한 것마저도 크고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업적도 남겼다. 어쩌면 짐 퓨릭의 말처럼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미 그의 플레이를 봤다는 것에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과연 뭘 잃어버렸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게 웅대했을 거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우리는 그리고 골프계는 그 기회를 놓쳤다. "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그가 뭔가를 해낼 때마다 내 이름이 그의 이름과 나란히 언급되는게 거웠다. 내 존재가 계속 일깨워졌다. " _ 잭 니클라우스

 

아이고, 이런!

타이거가 잭의 기록을 경신할 거라던 우리의 예측은 빗나갔다. _마이크 오맬리(Mike O’Malley) 

타이거 우즈가 프로 통산 열세 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2007년 PGA챔피언십은 그가 가장 최근에 참가한 열두 번의 그랜드슬램 대회 가운데 다섯 번째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열두 번의 메이저 대회 성적에는 2위 한 번, 공동 2위 두 번, 공동 3위와 공동 4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타이거는 확실히 흐름을 타고 있었다. 골프다이제스트는 2008년 1월호에서 우즈가 잭 니클라우스의 프로 메이저 대회 통산 18승의 기록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는 시점을 예측했다. 당시 우리는 이런 이유를 덧붙였다. 2008 타이거는 앞선 두 번의 마스터스에서 공동 3위와 공동 2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다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다섯 번째 그린 재킷을 차지하고 그가 이미 제압했던 토리파인스에서 열리는 그해의 US오픈에서도 이길 거라고 내다봤다. 그러면 그의 타이틀은 모두 열다섯 개가 된다. 2009 베스페이지에서 열린 2002년 US오픈을 재현하리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2008년 토리와 2010년 페블비치의 승자로 그를 점찍었고, US오픈에서 3년 연속 우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2002년에 그가 2위를 했던 헤이즐틴에서 열리는 PGA챔피언십은 그의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제 숫자는 16이 됐다. 2010 골프에 기정사실이라는 건 없지만, 우리는 타이거가 이해에 페블에서 열리는 US오픈에서 우승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가 2000년에 15타 차로 압승을 거뒀던 곳이다. 그리고 디오픈이 열리는 세인트앤드루스에서도 2000년에는 8타 차, 2005년에는 5타 차로 우승한 바 있었다. 이 두 대회를 석권하면 18승으로 잭과 타이기록을 세우게 된다. 2011 니클라우스의 기록을 깨기에 오거스타내셔널보다 더 완벽한 곳이 있었을까. 이때 타이거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잭은 35세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 6승을 거뒀다.) 우리의 계산에 따를 경우, 타이거는 잭과 똑같이 그린 재킷 여섯 벌, PGA챔피언십 5승에 US오픈 4승을 기록하고 디오픈에서는 그보다 1승 많은 4승으로 모두 19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타이거가 그 이후에 또 몇 승을 올릴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당시에도 말했지만, 그렇게 짧은 기간에 19승을 차지할 수 없을 거라는 반론도 있었다. 우리는 향후 열세 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타이거가 6승을 거둔다고 예측했다(2007년 PGA챔피언십을 포함한다면 14개 대회에서 7승). 우리는 그가 1999~2002년 사이에 열한 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7승을 거뒀다는 사실로 재반박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어떤가. 타이거는 2008년 US오픈에서 우승했지만(사진) 이후로는 2009년 PGA챔피언십의 2위가 메이저 대회에서 기록한 가장 높은 순위였다. 우리는 그가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릴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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