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성적이었던 꼬마 골퍼 테일러 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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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적이었던 꼬마 골퍼 테일러 구치
  • 유연욱
  • 승인 2018.10.1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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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를 목적으로 플레이 하는 것과 생계를 위해 플레이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프로에 입문해 출전한 첫 대회가 PGA투어 대회였다. 에이전트가 페덱스세인트주드클래식의 주최 측 인사를 알고 있어서 2014년 스폰서 초청 선수로 참가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전 오클라호마주립대학 팀이 NCAA 챔피언십 2위에 오른 것을 언론에서 대서특필한 것 역시 도움이 됐다. 11번홀까지 2언더파를 기록했지만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호텔로 일찍 돌아와야 했다. 나는 SNS를 통해 어려서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던 J.T. 리얼 무토가 마이애미 말린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르는 것을 지켜 봤다. 2안타를 기록한 그와 나는 문자를 주고받으며 미친 듯이 행복해했다. 오클라호마주 미드웨스트시티 출신의 두 꼬마가 프로 무대에서 활약 할 가능성이 과연 몇 퍼센트일까? 나는 그 대회에서 컷 탈락했다. 그리고 다시 투어에 합류하기까지 4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 론은 텍사스 레인저스의 트리플A 팀에서 선수 활동을 했다. 우리는 아버지를 체육 코치로 생각했다. 스크래치 골퍼였던 아버지는 조용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으며 아이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기저귀를 찬 내게 처음 플라스틱 클럽을 쥐게 했다. 여섯 살 때 모든 홀의 150야드 지점에서 티 샷을 해 79타를 쳤다.

존콘래드리저널골프코스에서는 종종 복역수들이 잔디를 깎았다. 이들 곁을 지날 때면 언제나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가끔 사진을 찍어 컨트리클럽의 라이벌들에게 보내곤 했다. 나는 모든 기회를 활용했다. 우리는 대가족이 모여 살았다. 가족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여행 경비를 마련해준 덕분에 골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아홉 살에 미국 유소년골프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오클라호마주립대학 골프 팀은 매년 여름 주니어 캠프를 열었다. 카운슬러 중 한 명이었던 켈시 클라인은 이제 막 졸업해 미니투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여느 열 살 소년처럼 프라이드치킨과 감자튀김을 즐겨 먹는 토실토실한 아이로 나를 기억하는데, 내 나이에 그토록 재빠른 손놀림으로 벙커 샷을 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남동생이 없던 그와 형이 없던 나는 좋은 골프 친구가 됐다. 그는 열한 살 때 미국주니어아마추어퀄 리파이어에 출전한 나를 위해 캐디를 맡았다. 플레이오프 첫 홀에서 상대는 12m짜리 퍼트를 성공시켜 버디를 잡았다. 울고 있는 나에게 켈시는 말했다. “골프는 힘들어. 앞으로도 이런 상황을 몇 번씩 겪게 될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지금 너처럼 누군가가 울게 될 거야.”

열세 살 때 야구 대회에 출전한 다음 날 골프를 했는데 모든 것이 망가졌 다. 두 가지 스윙이 충돌한다고 생각해 결국 야구를 그만뒀다. 야구 광팬이었던 삼촌들은 내 결정을 번복하려고 했다. 나는 큰 소리로 프로 골퍼가 되고 싶다고 선언했다.

나는 고등학교 수석 졸업생이었다. 고별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놀림을 받지 않으려는 것도 있었지만 공부를 희생할 계획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시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할까 고민했지만 과학대학 빌딩에서 아기 침대를 발견하고 생각을 바꿨다. 골프 팀 코치인 마이크 맥그로는 팀 소속 선수 중 누구도 그런 전공을 택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대학에서 내 별명은 무스(Moose, 북 미산 큰 사슴)였다. 미식축구장에서 왕복 달리기를 하던 내가 사슴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한 선배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침 6시 운동을 제외하면 정기적인 훈련 일정은 없었다. 우리는 마지막 수업이 끝난 후 느긋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코스에 모였다. 나는 매일 오후 12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골프장에 머물렀지만 우리 팀에서 4위 이상 올라가본 적이 없었다. 모건 호프만, 케빈 트웨이, 피터 유라인 같은 친구들이 언제나 나를 앞질렀다. 성적이 뛰어난 팀의 일원이 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개인용 제트기를 타고 이동했고 유명 맛집인 루스크리스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대학 시절 한 차례도 우승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5위권에는 여덟 차례나 들었다. 해럴드 바너 3세는 자신의 에이전트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제프 스테이시는 멤피스에서 첫 프로 대회에 출전하도록 했고 캘러웨이와 용품 계약으로 내가 프로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게 해주었다. 나는 2750달러(약 310만원)를 들여 매켄 지투어 퀄리파잉 대회에 참가했다. 출전 자격을 확보했고 여름 시즌에 열린 12개 대회에 빠짐없이 출전했다. 캐나다를 가로지르며 운전을 하고 저 렴한 호텔에 묵으며 돈을 아껴야 하는 대학 시절보다 열악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5위권에 들었던 성적에 힘입어 웹닷컴투어 카드를 얻었고 다섯 차례 출전 만에 웹닷컴투어 파이널 시리즈까지 이르렀다. 두 시즌 동안은 15위와 17위를 기록했다.

트로피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 생계를 목적으로 한 플레이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가족을 거느린 사람들과 경쟁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더 현명했고 더 체계적이었다. 적응하지 못하면 취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내 삶을 분 단위로 쪼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자꾸 재발하는 허리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트레이너를 고용하는 데 돈을 투자했다. 아무 때나 일어나 볼을 치는 대신 훈련 프로그램을 짰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다.

비제이 싱, 최경주를 거친 베테랑 캐디 맬컴 베이커를 만났다. 그는 까다로운 칩 샷도 알고 있었고 어디서 식사하는 것이 좋은지도 꿰고 있었으며 내가 루키라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했다. 그는 내가 우승했을 때 캐디를 맡지 않았다. 웹닷컴투어 2017 뉴스센티넬오픈이 열리던 주간에 그가 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켈시 클라인이 캐디를 맡았다. 마지막 퍼트를 성공시켰을 때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우승은 이번 시즌 PGA 투어에서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토록 감격적인 순간은 처음이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기 위해 15년을 기다려왔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250위에 오른 선수와 50위에 오른 선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부분에서 아주 작은 발전 가능성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전직 카우보이인 찰스 하월 3세는 매주 목요일 아침 7시에 연습 라운드를 위해 1번 티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글_맥스 애들러 (Max Ad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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