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인터뷰] 이원준, 과거의 나를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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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인터뷰] 이원준, 과거의 나를 마주하다
  • 고형승 기자
  • 승인 2019.08.0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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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우승 퍼트를 홀에 떨구는 데까지 프로 데뷔 후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원준은 KPGA선수권대회 일주일 전 주니어 선수 시절 받은 트로피를 대부분 내다 버렸다. 과거의 영광에만 빠져 사는 게 지금의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리고 진열장 빈자리에 오랜만에 트로피 하나를 추가했다. 

그동안 나는 골프계에서 철저히 잊힌 존재였다. 2006년 11월에 프로로 데뷔한 이후 우승과 거리가 먼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네 살 때 호주로 이민을 가 골프 클럽을 잡고 아마추어 정상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내가 30대 중반까지 프로 무대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는 없었다. 2007년 아시안투어에서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앞두고 ‘2010년 이전에 반드시 마스터스에 출전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007년 디오픈에 참가해 공동 49위에 오른 것이 내 유일한 PGA투어 기록이다.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선수가 프로 데뷔 후 13개월 동안 우승이 없어도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질 텐데 13년간 우승이 없었다면 그것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는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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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선수 시절에는 어떤 골프장을 가더라도 드라이버를 꺼내 들었다. 보기를 두려워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다른 선수보다 버디를 더 많이 잡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하는 게 내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정말 공격적이었다. 더블보기를 범하면 버디를 두 개 잡거나 파5홀에서 이글을 기록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시안투어가 열리는 동남아 골프장은 그런 오만한 생각을 단숨에 짓밟아버렸다. 오비와 해저드 그리고 울창한 숲과 싸워야 했고 그것은 수많은 레이업 상황으로 이어졌다. 아시안투어를 경험하면서 골프에 관한 자신감이 급격히 사그라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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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실력은 다른 프로 골퍼보다 밑바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했고 지레 겁을 먹고 필드에 나서기를 반복했다. 긴장의 수준이 아니라 다리의 힘이 풀려 조절할 수 없는 떨림이 온몸에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것은 자신감의 결여로 이어졌고 지금도 후회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2008년부터 PGA 네이션와이드투어(2부투어)에서 활동했다. 한번은 미국 골프채널과 인터뷰하는데 리포터가 “페어웨이를 잘 지킨다면 더 성적이 좋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코스 양쪽에 서 있는 나무와 나무 사이로만 볼이 들어가도 솔직히 정말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절대 바른 생각이 아니었다. 거리를 줄이더라도 페어웨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는 ‘플레이를 못해도 어느 선까지만 못하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섰다. 머릿속에서 ‘너는 못해’라는 말이 맴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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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족이 하는 말은 모두 잔소리로 들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히 어떤 의미로 말하는지 알겠지만 말하는 방법 때문에 조언이 결코 조언으로 들리지 않았다. 멘탈 코치도 세 명 정도 만나봤지만 시간만 허비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 명은 스윙을 바꾸라고 조언했고 다른 두 명의 코치는 아주 뻔하고도 상식적인 답변만 늘어놨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자신 있게 샷을 하세요”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물어보면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라는 답만 돌아왔다. 그때 깨달았다. 멘탈 코치는 잘하는 선수에게 더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돈을 버는 직업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더 나은 코치를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서 나는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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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노력하는데 성적이 나오지 않으니 연습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보다 노력하지 않고 실력도 뛰어나지 않은 선수(물론 주관적인 생각이었다)가 우승하는 걸 지켜볼 때는 좌절감과 상실감이 컸다. 그런 선수가 한두 명일 때는 버틸 수 있었지만 그 수가 점점 많아지는 건 골프가 싫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충분했다. 한동안 골프도 하고 싶지 않았고 친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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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12년 즈음 호주에서 내 손목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사실 이건 부상이라기보다 선천적인 문제였다. 나는 오른팔 뼈의 길이가 다르게 태어났다. 아래팔뼈를 이루는 요골(노뼈)과 척골(자뼈)의 길이가 달라서 골프 스윙 동작을 할 때 무리가 가면서 오른 손목의 뼈가 닳았다. 의사는 “골프를 더는 하기 힘들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의 입에서 더 끔찍한 말이 이어졌다. “수술을 통해 생활하는 데 무리가 없게끔 만들 수 있지만 골프를 할 수 있게끔 만드는 건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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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도 손목이었지만 드라이버 샷이 최악이었다. 입스까지는 아니었지만 지구 안으로 볼이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내 일과에 골프는 단 1도 없었다. 골프에 관한 생각이 없어졌다. 1년 6개월 이상 골프 클럽을 한 번도 잡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친구들과 밥을 먹고 볼링을 하러 갔다. 그중 한 명이 갑자기 “손목은 괜찮아?”라고 물었다. 손목을 의식 하지 않고 있다가 문득 내가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자 그 친구는 “다음 주에 골프장 갈래?”라고 물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이븐파로 라운드를 마쳤다. 드라이버 샷도 좋았고 ‘재미’라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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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때는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퀄리파잉스쿨 신청 기간이었다. 슬쩍 인터넷으로 신청 기간을 검색하고 혼자 일주일을 끙끙 앓았다. 골프에 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가보고 싶은 곳도 가보지 못했고 해보고 싶은 것도 해보지 못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도 못 보여준 것 같았다. 2013년 말 일본 퀄리파잉스쿨에 도전했지만 추운 날씨에 손목 통증과 목에 담이 결려 경기를 기권하고 말았다. 하지만 관리만 잘하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듬해 다시 도전했다. 퀄리파잉스쿨을 통과하고 2015년 시드를 받았다. 그때부터 골프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좋지 않은 성적에 관한 불만은 없어졌다. 골프를 할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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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부상으로 쉬는 2년 동안 정신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어깨를 짓눌러오던 부담에서도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난 사람들에게 잊힌 선수이기 때문에 내가 퀄리파잉스쿨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골프 클럽을 잡을 일이 없을 줄로만 알다가 다시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지난해 어머니와 의견 차이로 크게 다툰 적이 있다. 어머니는 내가 주니어 시절 받은 트로피를 소중히 여겨 진열장 가득 모아놨다. 더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그 트로피를 버리길 바랐다. 어머니는 “소중한 추억이고 기록이니까 남겨놔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10년도 훨씬 넘은 그 기억을 누가 알아주지 않아요. 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누가 기억하겠어요. 지금이 더 중요하다고요”라고 반기를 들었다. 솔직히 짐만 될 뿐이었다. 나는 “그 트로피를 매일 보면서 골프를 할 순 없어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올해 KPGA선수권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의미 있는 트로피 몇 개만 놔두고 모두 내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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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장 안 트로피를 받은 선수는 과거의 이원준이었다. 현재의 이원준은 또 다른 선수다. 나는 과감히 예전의 이원준과 연결 고리를 끊어내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과감하게. 내가 트로피를 버리는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아내(세 살 연하의 이유진 씨는 현재 임신 7개월째다)도 “이걸 다 버리는 건 아닌 것 같아”라고 말렸다. 하지만 나는 “진열장에 공간이 있어야 트로피가 들어올 거야”라고 말하며 아내를 안심시켰다. 트로피를 버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트로피는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이제 진열장에 새로운 트로피를 더 채우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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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새로운 트로피 하나를 진열장에 넣을 수 있었다. 프로 데뷔 이후 처음 받은 트로피이자 코리안투어 최고의 메이저 대회에 걸린 트로피였다. 사실 큰 기대를 안고 간 대회는 아니었다. 부산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아내와 여행 가는 기분이 들었다. 대회를 앞둔 수요일에는 연습을 뒤로하고 해운대에서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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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암 때는 함께한 동반 플레이어가 “정말 따라 하고 싶은 퍼팅 스트로크”라는 말을 경기 내내 했다. 사실 퍼트 연습이 충분하지 않아 자신이 없었는데 그 말은 내게 큰 힘으로 작용했다. 대회 기간 내내 퍼트가 좋았다. 그는 몇 년 전 프로암을 함께한 매슈 그리핀(Matthew Griffin)이 그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나에게도 우승의 기운을 불어넣어줬다. 그건 그대로 적중했다. 혹시 우승이 간절한 선수가 있다면 프로암 때 그와 꼭 플레이해보길 바란다.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닌가. 나에게 전화하면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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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할 때 처음 들었던 느낌은 그동안 무거웠던 어깨가 아주 살짝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우승의 기쁨을 잠깐 느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행복은 아니었다. 골프의 목표와 인생의 목표를 나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하나의 과정 중 하나가 우승이었다. 우승하고 바로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했지만 안 맞을 때는 또 안 맞는 게 골프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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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발레를 전공한 아내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언제나 아내는 “거기서 왜 그렇게 했어?”가 아니라 “괜찮아”라는 위로의 말을 먼저 건넨다. 화가 나서 골프 클럽을 부러뜨리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당장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화를 억누를 새도 없이 아내는 조용히 다가와 내게 화장실 청소를 부탁한다. 내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그건 그거고 집안일은 집안일이야”라고 말한다. 화를 내는 건 이제 내게는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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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누군가가 “목표가 뭐냐”라고 물어보면 나는 항상 숨겨왔다. 어릴 때는 ‘내가 목표를 입 밖으로 꺼낸 후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실패한 선수가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몇 가지 목표가 있다. PGA투어 진출에 관한 꿈은 내가 골프를 중간에 그만둘 때도, 다시 시작할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 깊숙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우승으로 그것이 강해졌다. 한 번쯤 세계 랭킹 50위권에 드는 선수가 되고 싶다. 또 몸만 허락해준다면 55세까지 골프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곧 태어날 딸(호주 시드니에서 아이를 가져 태명이 ‘드니’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다. 

이원준 
나이 : 34세 
신장 : 190cm 
프로 데뷔 : 2006년 
우승 : KPGA선수권대회(2019) 
가족 : 부인 이유진, 7개월 된 태아 ‘드니’

[고형승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tom@golfdige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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