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우의 골프 역사] 브리티시골프박물관에서 살펴 본 골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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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우의 골프 역사] 브리티시골프박물관에서 살펴 본 골프 역사
  • 인혜정 기자
  • 승인 2019.10.2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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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대 조상우 교수가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에 자리한 ‘브리티시골프박물관’에 다녀왔다. 골프의 기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전하는 골프 역사를 살펴봤다. 골프 규칙, 캐디, 클럽, 공, 복장에 대해 전한다.

1700년대 귀족들이 즐기던 골프
영국왕립골프협회(R&A)의 조사에 따르면 세계 249개국 중에서 골프가 보급된 국가는 209개국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골프 박물관을 운영하는 국가는 영국, 미국, 한국, 일본, 캐나다를 비롯해 주로 골프장을 많이 보유한 국가로 골프 보급 국가의 10%도 안 된다. 브리티시골프박물관은 R&A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골프 기원에서부터 클럽, 공, 골프 복장 등의 변천사는 물론 트로피, 캐디, 골프 선수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희귀한 골프용품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오늘날 우리가 하는 골프는 스코티시의 게임으로 영국과 전 세계에 전해지기 전에 스코틀랜드의 동부 해안에서 발전했다”고 명시돼 있다. 오래된 사진이나 그림은 당시의 환경이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경기자의 복장과 그들의 신분, 클럽 형태, 경기 진행 방법 등 많은 정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1을 통해서도 골프장은 해안가 언덕 위의 넓은 초원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골퍼의 복장이 화려한 것으로 보아 귀족 신분임을 짐작하게 한다. 클럽을 들고 있는 캐디를 보니 당시 골프백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티 박스의 구분도 없어 보이며 그린도 보이지 않는다. 골프장에 풍차가 있고 양 떼와 목동이 돌아다니고 있어 친환경적 공간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위의 그림을 보며 골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티샷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티(Tee)가 언급된 것은 1636년이다. 당시의 티는 오늘날의 나무나 플라스틱 재질이 아닌 젖은 모래를 사용했다. 퍼팅은 1690년에 이르러서야 언급되기 시작했다. 벙커와 퍼팅 그린은 1812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처음으로 규칙에 등장했다.

그리고 홀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1625년 영국 애버딘에 있었다. 홀의 수는 골프장마다 차이가 있었다. 에든버러에 있는 리스(Leith)와 브런츠필드(Bruntsfield) 링크스는 각 다섯 개씩 홀이 있었다. 세인트앤드루스 링크스는 원래 11개 홀로 22홀 경기에서는 두 번 경기해야 했다고 한다. 1764년 홀의 개수가 세계적으로 표준화되면서 18홀로 바뀌었다.

1. 1700년대 골프를 즐기는 모습 2. 골프와 유사한 초기 게임으로 유럽에서 들기던 죄드 마이

골프와 유사한 초기 게임은 죄드마이
수 세기 동안 세계 각지에서는 서로 다른 종류의 공과 스틱을 가지고 놀이를 즐겼다. 유럽에서 행하던 죄드마이(jeu de mail), 콜프(colf)와 중국의 추이완(chuiwan)과 같은 골프와 유사한 초기의 게임은 홀보다는 땅 위의 표적을 사용했다. 사진2에 보이는 말렛은 죄드마이의 스틱과 공이다. 이 놀이는 1400년대 프랑스 지역에서 만들어진 게임이다. 돌, 나무, 문 등을 표적으로 공을 치는 형태였다.

몇 해 전 필자가 해외 경매에서 쇠로 만들어진 17세기경의 골프 클럽 헤드를 두 개 구매한 적이 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렇게 생긴 형태의 클럽 헤드는 본 적이 없어서 이것이 과연 클럽 헤드가 맞나 반신반의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헤드가 전시실 유리 케이스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진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1744년 최초의 경기 규칙 등장
골프 경기가 정확하게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500년 이상된 것은 분명하다. 골프경기 규칙이 성문화된 것은 1744년이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리스 링크에서 13개 조항으로 만들어졌다. 규칙 중 일부는 현대의 골프 규칙에도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티에서 볼을 친 뒤 교체할 수 없는 것, 홀에 볼을 넣을 때 클럽이나 다른 것으로 표시하면 안 되는 것, 볼이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서 정지되었을 경우 그 위치에서 볼을 쳐야 하는 것 등이다.

3. 13개 조항의 최초의 골프 경기 규칙(1744) 4. 롱노즈 클럽(1840~1860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만든 캐디 규칙
1864년에 이르러서는 캐디에 관한 규칙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만들었다. 캐디의 유래는 프랑스 왕비였던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 스코틀랜드 여왕이 골프를 할 때 프랑스의 어린 사관 생도를 시중 들게 해 그들을 부르던 프랑스어 ‘르 카데(Le Cadet)’가 몇 세기를 거치며 현대 골프의 ‘캐디(Caddie)’가 됐다는 것이 가장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나타난 현대적 개념의 ‘캐디’는 1681년 잉글랜드 요크 지역의 골프 경기에서 ‘포어(Fore) 캐디’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당시에는 페더 볼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소년들을 포어 캐디로 고용해 볼을 찾도록 했다. 그 후에 세인트앤드루스에서 만든 캐디 규칙은 세월이 흐르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들었다. 그 내용은 엄격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지켰다고 한다.

1 모든 캐디는 등록해야 하고, 13세 미만은 허가하지 않는다.
2 등록된 캐디는 클럽 회원에 의해서만 고용된다.
3 등록된 캐디 명단은 클럽 홀과 골프 클럽 제작 숍에 비치한다.
4 캐디는 실력이나 연령에 따라 두 가지 등급으로 나뉜다. 그들의 서비스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퍼스트 클래스 캐디, 첫 번째 라운드는 18펜스이고, 그 후 이어지는 라운드나 부분적인 라운드는 6펜스. 세컨드 클래스 캐디, 첫 번째 라운드는 1실링이고, 그 후 이어지는 라운드나 부분적인 라운드는 6펜스
(※영국의 구 화폐제도에서 1파운드가 20실링, 1실링은 12펜스였음).
5 이전에 고용되지 않은 캐디는 일정 기간 동안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후에 회원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다.
6 출장 정지되거나 자격이 상실된 캐디의 명단은 게시된다.
7 벌칙을 받은 캐디는 그린키퍼를 통해 그린 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8 징계는 그린 위원회의 둘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1. 구타페르카 볼 2. 구타페르카 볼을 만드는 프레스와 모듈(1880~1890년대) 3. 페더 볼을 만드는 모습

골퍼의 메카, 세인트앤드루스
1580년경 세인트앤드루스의 지도로는 당시 골프장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사진11의 오른쪽에 있는 대성당의 위치로 보아 1754년에 설립된 세인트앤드루스골프장은 사진 왼쪽 상단의 바닷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골프는 1700년대와 1800년대를 거치며 바로 이곳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게임으로 진화했다. 당시 골퍼들은 세인트앤드루스를 골프의 메카로 인정했고 1800년대에 이곳의 클럽과 볼 메이커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페더 볼의 긴 비거리는 361야드
우리가 알고 있는 초기의 클럽은 나무로 만든 스푼과 퍼터였다. 이것들은 롱 노즈 클럽으로 현대의 클럽보다 길고 가느다란 헤드를 가졌다. 최초의 아이언 클럽은 플레이하기 어려워 러프의 어려운 라이에서 공을 꺼내는 데에만 사용했다.

이 무거운 아이언 클럽은 깃털로 만든 페더 볼을 손상시켜 공을 터뜨릴 수 있었다. 페더 볼은 비거리가 많이 나가지 않아 대부분이 평균 200야드를 날렸다. 페더 볼의 가장 긴 비거리는 1836년 새뮤얼 메식스(Samuel Messieux) 경의 기록으로 세인트앤드루스골프장에서 361야드를 날린 것이다.

골프공과 골프 클럽의 발달은 더 멀리 치고 싶은 골퍼와 더 멀리 보내고 싶은 클럽 제조자의 필요에 따라 상호 보완하며 발전해왔다. 당시의 골프 클럽을 만들던 사람들은 클럽 헤드 뒷면에 자신의 이름, 지명은 물론 해머, 하트, 화살, 꽃, 열쇠 등 고유의 문양을 사용해 누가 클럽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페더 볼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들어 가격도 비쌀 뿐 아니라 강도도 약해 몇 회 라운드하다 보면 쉽게 파손됐다. 이러한 페더 볼의 단점을 보완해 나온 것이 구타페르카 볼이었다. 구타페르카는 동남아시아의 열대지방에서 채취한 두껍고 검은 고무와 같은 수액으로 1848년경 런던을 거쳐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구타페르카 볼은 페더 볼보다 오래, 물에 젖어도 사용할 수 있었다.

또 프레스와 모듈을 사용해 페더볼 보다 쉽게 볼을 만들 수 있어 가격도 저렴하고 인기가 높았다. 골퍼와 볼 제작자들은 볼이 임팩트 후 매끄러운 표면일 때 볼이 공중에서 더 잘 날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볼의 비행을 개선하기 위해 볼의 표면을 파내고 홈을 만들었다. 이렇게 발전하며 만든 것이 구타페르카 볼이다. 지금의 골프볼처럼 딤플이 음각으로 파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양각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그것을 ‘브램블(bramble)’이라고 했다.

모래 티가 나무 티가 되기까지
골프 티의 변천 과정은 볼과 클럽 헤드와 함께 변해갔다. 볼을 나무로 만들던 시절에는 골프 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과 클럽 헤드가 비거리를 내기 위해 변하면서 모래로 사용하던 티를 종이, 알루미늄, 나무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었다. 모래로 티를 만들던 시기에는 티 박스에 모래와 물 양동이 두 개가 있었다.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만들 듯 모래를 물에 적셔 티 형태를 만들어 사용한 것.

골프 의류의 변천사
박물관 전시실을 돌아 마지막 전시실에 이르면 복고풍 골프 의류를 직접 입고 사진을 찍어 기념할 수 있도록 공간이 마련돼 있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골프 의류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과연 저런 복장으로 어떻게 골프 스윙을 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중세의 귀족은 연미복 차림으로 스윙을 하고 퍼팅을 하며 구두를 신고 코스를 걸어 다녔다. 오늘날과 같이 전문적인 골프 의류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신분에 따라 평상시 입던 옷을 그대로 갖춰 입고 골프를 즐겼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일상복도 바뀌면서 골프 경기에서도 그 불편함이 느껴지자 차츰 간편한 복장으로 바뀌었다.

특히 골프가 스코틀랜드에서 미국 등 세계 여러 지역으로 소개되면서 연미복이었던 남성들의 복장이 조끼와 스웨터에 니커보커스 차림새로 변모했다. 여성들은 셔츠, 니트와 치마를 입고 골프를 즐겼다. 다음 호에서는 골프 선수와 골프 대회 관련 전시물을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글_조상우 / 정리_인혜정 골프다이제스트 기자(ihj@golfdigest.co.kr)
[사진_게티이미지(Getty Images), 조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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