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싶은 벙커의 입장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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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싶은 벙커의 입장 표명
  • 김성준 기자
  • 승인 2021.12.2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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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다이가 설계한 소그래스TPC 스타디움 코스 11번홀에서 벙커샷을 하는 김시우

캐디가 전해주는 ‘벙커전’이라는 말은 골퍼들이 코스에서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달콤한 말 중 하나다. 그만큼 아마추어 골퍼들은 벙커에 볼이 들어가는 것을 최악의 상황이라고 여긴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전이 바로 ‘벙커전’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골퍼들은 스탠스를 견고하게 설 수 없고 클럽도 바닥에 대지 못하는 벙커에 위협을 느낀다. 벙커 샷 기술이 떨어지는 골퍼는 두세 타를 잃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골퍼들이 이토록 ‘극혐(극도로 혐오)’하는 벙커는 원래 자연적인 장해물이었다.

초창기 영국의 코스에서는 동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바람에 의해 넓어진 곳이 벙커였다. 이후 골프 코스가 규격화되고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코스를 설계하기 시작하면서 벙커는 코스에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 벙커는 잘못 친 샷을 응징하는 역할이 가장 크기 때문에 벙커는 스트레스의 주범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벙커는 골퍼를 도와줄 때도 있고 골프의 재미 요소를 한층 높이기도 한다. 벙커에 대한 미움과 오해. 이번 기회에 풀어보자.

◆존재의 이유

벙커는 골퍼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고 실제 스코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벙커는 크기와 모양, 깊이에 따라서 쓰임새가 다양하고 설계 관점에서 몇 가지 주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벙커의 첫 번째 기능은 ‘전략성’이다. 벙커는 샷 밸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벙커의 어려운 정도와 배치에 관한 규정은 없지만, 일반적인 코스 설계에서 그린 근처에 있는 벙커는 어렵고 그린에서 먼 벙커는 비교적 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현강 오렌지엔지니어링 전무(코스 설계가)는 “벙커의 위치가 홀의 형태를 좌우한다고 봐야 한다. 벙커는 코스의 전체적인 난이도를 조절하는 중요한 장치”라고 말한다. 코스 설계가 벙커의 위치와 크기, 깊이 등을 고려해 리커버리 샷의 난이도를 설정하며 드로 샷이나 페이드 구질을 요구하도록 배치한다. 벙커 샷의 기술 수준에 따라 난이도의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리커버리가 불가능한 물이나 OB보다 전략적으로 더 많은 재미를 줄 수 있다.

벙커의 두 번째 기능은 골퍼를 돕는 것이다. 잘못 친 공이 더 나쁜 곳으로 굴러가지 않게 해서 볼이 코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막아준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산악형 코스나 바다 옆에 건설된 코스는 절벽이 많다. 그런 절벽으로 볼이 굴러가는 것을 벙커가 막아준다.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잘못 친 공으로 인해 인명 피해가 나거나 구조물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벙커의 세 번째 기능은 샷을 해야 할 방향이나 플레이해야 하는 경로를 지정해주는 것이다. 특히 나무가 별로 없는 듄스 코스나 링크스 코스를 처음 방문한 골퍼는 홀 구별이 어려워 벙커를 등대 삼아 샷을 날려야 한다. 또 벙커를 기준으로 보내야 할 거리 등을 설정하기도 한다.

벙커의 마지막 기능은 심미성이다. 적절하게 배치된 벙커는 아름다운 코스의 외관을 완성한다. 웰링턴CC, 베어크리크 춘천 등을 설계한 노준택 로가이엔지 대표는 “2000년대 이르러 벙커의 깊이가 깊어지고 그린이나 페어웨이 주변의 지형과 어우러져 심미성을 높이는 형태로 조성되고 있다. 기존 장해물 역할과 방향을 지시하는 기능에서 인지성과 심미성을 더하는 기능으로 진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도하게 벙커를 만드는 경우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코스 설계가 폴 잰슨은 “오늘날 벙커 조성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규칙적인 패턴으로 만든 벙커는 홀 경관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과거 유명 설계가들이 자신들만의 벙커를 디자인한 것처럼 요즘 설계가도 이런 것이 훗날 예술로 평가받으리라 기대하며 벙커를 조성하기도 한다. 플레이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페어웨이 가장자리에 벙커를 벌집같이 조성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설계 예술가들

벙커를 보면 코스 설계자의 설계 철학과 스타일을 알 수 있다. 코스 건설 황금기에 활동하던 유명 코스 디자이너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벙커를 시그너처 랜드마크처럼 사용했다. 난도 높은 설계로 유명한 피트 다이가 설계한 코스는 손가락 모양으로 만들어진 핑거 벙커와 철도 침목을 사용한 깊은 벙커가 특징이다.

플레이어스챔피언십이 열리는 소그래스TPC의 핑거 벙커와 2020년 라이더컵이 열렸던 휘슬링스트레이츠의 1012개의 벙커를 보면 피트 다이에게 ‘골퍼를 괴롭히는 것이 취미인 코스 설계의 사디스트’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알 수 있다. 국내에는 피트 다이의 아들, 페리 O. 다이가 설계한 우정힐스CC에서 소그래스TPC와 비슷한 스타일의 벙커를 엿볼 수 있다.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내셔널을 설계한 앨리스터 매켄지는 불규칙하고 들쭉날쭉한 벙커 스타일을 주로 사용했고 그레그 노먼은 벙커 페이스가 높은 위협적인 벙커를 주로 설계했다.

이현강 전무는 “국내 코스는 가용 부지가 넓지 않아 설계가의 의도대로 벙커 배치가 힘들다. 또 국내 기후가 외국과 달라서 외국인 설계자가 디자인한 벙커가 국내에 잘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벙커는 코스 성격과 설계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에 많은 고민 후 벙커를 배치한다. 벙커가 잘못 배치되면 골프의 공정성을 해친다”고 말한다. 이처럼 벙커에는 설계자의 수많은 고민과 번뇌, 철학이 담겨 있다.

◆어려워야 벙커

프로 골퍼들의 벙커 샷을 보면 너무 쉬워 보인다. 그들은 깊은 러프보다 벙커를 선호한다. 깊은 러프에서 샷을 하는 것보다 깨끗한 라이의 벙커가 스핀 컨트롤을 더욱더 쉽게 만들기 때문이다. 샷 기술이 좋은 것도 있지만 토너먼트 코스의 벙커는 아마추어 골퍼가 플레이하는 벙커보다 더욱 완벽하게 정리된 것도 그들의 벙커 샷을 쉽게 만들어주는 요인 중 하나다.

프로 골퍼이자 코스 설계자로도 유명한 그레그 노먼은 “벙커는 진정한 위험 구역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프로 골퍼들은 일반적인 벙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벙커는 가장 완벽한 라이인 것이다. 벙커 주변과 모래 정리를 너무 완벽하게 해놓는 것이 문제다. 그들에게 벙커보다 디봇이 더 위험 구역이다”라고 말하며 지나치게 완벽한 벙커에 불만을 표했다.

아마추어 골퍼들이 벙커 샷 연습을 할 장소가 마땅치 않은 것도 벙커 샷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국내 드라이빙레인지 중에서 벙커 샷을 연습할 수 있는 곳은 극소수다. 또 레슨 프로와 필드 레슨을 가지 않는다면 영상이나 책을 보고 간접적으로 벙커 샷 기술을 배워야 한다.

벙커는 골프 플레이에 필수 요소다. 벙커 샷 기술이 부족한 골퍼에게 벙커는 악마가 파놓은 구멍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수한 골퍼에게 어느 정도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도 벙커의 기능 중 하나다. 골퍼들이 벙커를 두렵게 느끼지 않는다면 벙커는 장해물로서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최근 코스 진행상 이유로 코스의 모래 벙커를 잔디 벙커로 만들거나 아예 없애는 골프장이 있다.

이 전무는 “벙커를 메우는 이유는 대부분 코스 진행상 이유다. 영업 실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골프장은 골퍼의 불만이 많은 벙커나 원활한 진행을 방해하는 벙커를 큰 고민 없이 메워버린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작은 벙커 하나의 유무가 코스 공략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 벙커 하나를 배치할 때 수많은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코스 설계자의 노고와 플레이의 재미를 고려해 벙커의 위치를 바꾸거나 벙커를 없애려는 시도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또 실행 전 코스 설계가의 의견을 꼭 들어봐야 한다. 골퍼들도 벙커가 박진감 넘치는 골프를 만드는 긍정적 요소임을 인지하고 벙커에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 좋다. 벙커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벙커 플레이도 골프의 한 부분임을 받아들인다면 더욱더 즐거운 골프 라이프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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