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 마스터스 본고장에 대한 발직한 상상
  • 정기구독
[마스터스] 마스터스 본고장에 대한 발직한 상상
  • 서민교 기자
  • 승인 2022.04.07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마스터스 본고장은 혹시 이런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보비 존스와 클리퍼드 로버츠가 훗날 오거스타내셔널이 될 골프 컨트리클럽을 구상했을 때 두 사람의 계획은 원대했다. 두 개의 18홀 코스를 만들어서 하나는 여성 전용으로 사용하고 테니스 코트와 수영장, 야외 스쿼시 코트, 둘레길, 거기에 코스를 굽어보는 대형 건물이 최소한 스물네 곳 들어설 정도로 드넓은 부지, 그리고 해외 거주자를 다수 포함하는 1800명 규모의 회원을 염두에 뒀던 것이다. 1931년 봄에 그들은 조지아주의 오거스타에서 이상적인 부지를 찾아냈다. 양묘장으로 사용하다 버려진 그 부지에 대해 존스는 “이미 골프 코스처럼 보였다”고 나중에 어딘가에서 술회했다. 

하지만 존스와 로버츠가 프로젝트에 돌입한 시점은 안타깝게도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두 사람은 필요한 자금의 일부밖에 모으지 못했다. 미국 전역을 돌며 3년간 홍보를 하고 회비도 솔깃할 만큼 저렴했는데도(남성은 1년에 60달러, 부인과 자녀들도 이용할 경우 15달러 추가) 총 1800명 중에 76명을 모집하는 데 그쳤다. 코스도 하나밖에 만들지 못했지만, 완공이 되기도 전에 빚더미에 올랐다. 진 사라젠이 제2회 마스터스에서 ‘전 세계에 울려 퍼진 샷’을 보여주고 8개월이 지난 1935년에는 그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채권자들이 클럽에 압류를 걸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오거스타내셔널이 재정적으로 회복하기 시작하려니까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1942년 마스터스 직후부터 클럽과 토너먼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폐쇄되었다.   

오거스타내셔널과 마스터스가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외골수에 가까웠던 로버츠의 집념 덕분이다. 그는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존스를 기릴 영원한 기념비를 만들어내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다면 어땠을까? 1920년대의 호황이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면? 존스와 로버츠가 원래의 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두 조성할 수 있었다면? 1940년대에도 세계가 평화로웠다면? 존스와 로버츠가 자신들의 클럽에 조지아내셔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로버츠는 클럽에 주이름을 넣을 경우 조지아 사람들의 확실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실제로 거의 그렇게 될 뻔했다)? 그랬다면 조지아내셔널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

▲ 시간 속을 거닐다_오거스타내셔널을 찾은 사람들은 매그놀리아 레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며 그 순간을 만끽한다. 그러나 또 다른 세계에서라면 더 천천히 지나갔을 것이다. 원래의 계획은 포장하지 않은 출입구 A를 프루트랜드 양묘장(왼쪽)에 그대로 둔 채 보행 전용으로 사용하고, 클럽의 새로운 진입로를 남동쪽으로 135야드 떨어진 워싱턴 로드에 조성하는 것이었다. 가상의 조지아내셔널(위)에서라면  길을 거니는 걸 상상해볼 수 있다.
▲ 시간 속을 거닐다_오거스타내셔널을 찾은 사람들은 매그놀리아 레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며 그 순간을 만끽한다. 그러나 또 다른 세계에서라면 더 천천히 지나갔을 것이다. 원래의 계획은 포장하지 않은 출입구 A를 프루트랜드 양묘장(왼쪽)에 그대로 둔 채 보행 전용으로 사용하고, 클럽의 새로운 진입로를 남동쪽으로 135야드 떨어진 워싱턴 로드에 조성하는 것이었다. 가상의 조지아내셔널(위)에서라면 길을 거니는 걸 상상해볼 수 있다.

◇ 클럽하우스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 클럽하우스는 1857년에 완공되었다. 이곳을 디자인한 데니스 레드먼드(Dennis Redmond)는 아일랜드 이민자로 뉴욕주의 유티카에 살다가 오거스타로 이주한 농업 전문가였다. 레드먼드는 남부에서도 면화 대신 과실수를 키우는 것이 경제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는 ‘남부식 컨트리하우스’를 모델로 직접 설계해서 45cm 두께의 콘크리트벽을 세운 그의 집도 일종의 시범 사업으로 생각했다.  

존스와 로버츠가 처음 그 부지를 방문했을 때 그곳은 엉망이었다. 부엌도 없고, 배관과 전기도 설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간은 총 14개였지만 작고 어두웠으며, 너무 축축해서 창고로 쓰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건물 자체도 너무 작았다. 사진으로는 커 보이지만, 대부분의 부피는 3m 너비의 베란다와 나중에 덧붙인 부속건물에서 나왔다. 그 집을 최소한 거주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려면 전면적인 개조가 필요하다는 게 분명해 보였다. 오거스타내셔널의 의뢰로 그곳을 점검한 엔지니어는 회원들이 “현대식 편의시설을 모두 갖춘 현대식 건물에 더 만족감을 느낄 것 같다”는 최종 의견을 전달했다.  

레드먼드의 집을 보완하는 대신 존스와 로버츠는 10만 달러를 투자해서 그보다 몇 배 큰 규모의 새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고 현지 건축가이자 개발업자인 윌리스 어빈(Willis Irvin)을 고용했다. 어빈의 역할은 설계도까지였다. 그가 설계한 건물은 커다란 부속건물 두 개가 달렸고, 외부는 회반죽을 바른 벽돌을 붙였으며 슬레이트 지붕과 드넓은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회랑을 네 개의 높은 기둥이 떠받친 형태였다. 내부에는 남성용과 여성용의 커다란 로커룸 두 개가 있었다. 남성용 로커룸에는 1인용과 2인용을 합쳐 총 400개의 로커를 설치했다. 전망창에서는 코스가 내려다보였고, 곳곳에 설치된 작은 자리에서는 회원들이 브리지 게임을 하거나 요기를 하며 18번홀 그린에서 마지막 퍼트를 하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오거스타 크로니클은 그의 자세한 설계도와 함께 건물 전면의 상상도를 실었다. 오거스타내셔널의 초창기 회원들 중에는 원래의 건물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그 문제는 고려의 여지가 없었다. 클럽의 경제 사정은 기존에 있는 건물을 수리할 자금조차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지아내셔널이라면 존스와 로버츠에게 자금이 충분하다. 그들은 레드먼드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어빈의 야심 찬 설계대로 새 건물을 짓는다. 그 건물은 회원들과 그들의 가족이 모이는 명소로 자리 잡는다. 넓은 식당에서는 각종 행사와 연회, 파티가 자주 열린다.  

어빈이 남성용과 여성용 로커룸의 커다란 창문이 오리지널 코스의 18번홀 그린(현재 오거스타내셔널의 9번홀)을 바라보도록 건물의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존스와 로버츠가 코스의 순서를 바꾸는 일은 없다(실제로는 첫 번째 마스터스와 두 번째 대회 사이인 1935년에 순서를 바꿨다). 조지아내셔널의 1번홀은 코스 설계가인 앨리스터 매켄지가 그의 최종 레이아웃에서 의도했던 그대로이며, 현재 오거스타내셔널의 10번홀이다. 조지아내셔널의 2번홀(파4), 3번홀(파3), 4번홀(파5)은 탁월하지만 아무도 그곳들을 묶어서 아멘 코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 진달래 동산_초기 계획안에는 코스 가장자리를 따라 스물네 필지의 주택 부지가 할당되었다. 부지 남쪽 끝자락의 토지는 ‘향후 개발’용으로 지정되었다. 조지아내셔널에서는 유명한 파5 13번홀 그린 뒤쪽의 주택 거주자가 스포츠계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뒷마당 관람석을 보유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US오픈 개최지 명단에 포함되었다면 빨간 USGA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도 누렸을 것이다.
▲ 진달래 동산_초기 계획안에는 코스 가장자리를 따라 스물네 필지의 주택 부지가 할당되었다. 부지 남쪽 끝자락의 토지는 ‘향후 개발’용으로 지정되었다. 조지아내셔널에서는 유명한 파5 13번홀 그린 뒤쪽의 주택 거주자가 스포츠계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뒷마당 관람석을 보유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US오픈 개최지 명단에 포함되었다면 빨간 USGA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도 누렸을 것이다.

◇ 매그놀리아 레인

오거스타내셔널의 진입로 양옆으로 도열한 목련나무들은 남북전쟁 전에 씨앗을 심어서 기른 것이다. 1931년에는 나무들이 상당히 컸고, 그 사이로 난 흙길을 그 지방 사람들은 매그놀리아 애비뉴 또는 매그놀리아 레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존스와 로버츠는 차들이 안전하게 통과할 만큼 공간이 충분할지 걱정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클럽 정문을 남동쪽으로 135야드 떨어진 파3 코스의 서쪽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회전 진입로를 따라 설치할 생각이었다. 결국 가지를 어느 정도 쳐낸 끝에 매그놀리아 레인이 진입로로 손색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곳은 곧 모든 종목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입구가 되었다.  

하지만 조지아내셔널에서는 매그놀리아 레인이 보행자 전용이다. 클럽의 정문은 존스와 로버츠가 실제로 적격이라 생각했던 곳, 즉 워싱턴 로드와 현재 아이젠하워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도로의 교차 지점에 위치한다. 조지아내셔널의 회원들은 매그놀리아 레인을 사랑하지만, 자동차 진입로가 아닌 산책로로 사용한다. 그곳의 가장 대표적인 기능은 회원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 가족사진을 찍는 배경 역할이다. 그리고 해마다 열리는 부활절 달걀 찾기 행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최고의 계획_옴스테드 브라더스라는 회사가 1932년에 제시한 계획안에는 끝내 완성되지 않은 정문과 주택 필지가 포함되어 있다.
▲ 최고의 계획_옴스테드 브라더스라는 회사가 1932년에 제시한 계획안에는 끝내 완성되지 않은 정문과 주택 필지가 포함되어 있다.

◇ 골프 코스

원래 존스와 로버츠는 회원 수가 1000명을 돌파하는 즉시 여성들을 위한 두 번째 18홀 코스를 만들 계획이었다. 로버츠는 이런 글을 남겼다. “오거스타에 오는 거의 모든 남자들은 가정이 있고, 대부분의 경우 아내와 딸들도 골프를 한다. 가입 여부를 호의적으로 검토하려면 여성들도 솔깃해할 만한 요소가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건설 계획안에는 상대적으로 쉬운 두 번째 18홀 코스가 포함돼야 한다.”

오거스타내셔널의 건설 예산 초안에는 매켄지가 설계한 챔피언십 코스 20만 달러, 그리고 여성용 코스를 위한 14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존스와 로버츠는 여성용 코스로 오거스타컨트리클럽(남쪽으로 오거스타내셔널과 맞닿아 있는 클럽)의 두 번째 코스인 레이크 코스를 인수하는 가능성도 고려했다. 하지만 필요한 자금 마련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챔피언십 코스도 원래 계획한 비용의 절반인 10만 달러로 지었지만, 그조차 건설사와 자재 공급업체는 물론 매켄지에게도 전액 결제를 하지 못하는 파행 끝에 간신히 완공할 수 있었다.  

조지아내셔널이라면 존스와 로버츠가 현금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고, 1932년에 래스 크릭 반대편으로 클럽 부지의 남동쪽 모서리 근처에 위치한 레이크 코스도 매입한다. (레이크라는 이름은 래스 크릭이 흘러 들어가는 옴스테드 호수에서 가져온 것이다.) 매켄지는 코스의 길이를 줄이고 자신의 친구인 매리언 홀린스(Marion Hollins)와 함께 대부분 홀을 재설계한다. (홀린스는 실제로 오거스타내셔널을 지을 당시, 잠깐 동안 매켄지에게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

홀린스는 1921년에 US여자아마추어대회에서 우승했고, 1932년에 처음 열린 아메리칸커티스컵 미국 팀의 단장을 역임했다. 1923년에 문을 연 롱아일랜드 여성내셔널골프클럽의 설립자이자 공동 설계가였고, 1929년에 자신이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매켄지가 설계한 파사티엠포에서 매켄지와 존스의 이벤트 대회를 성사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사이프러스포인트를 개발했고, 매켄지는 그곳의 가장 유명한 홀인 파3 16번홀이 홀린스의 구상에서 탄생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거스타내셔널에서 매켄지는 원래 세 번째 코스를 짓고 싶어 했다. 그가 염두에 둔 건 아이언과 퍼터로만 플레이할 수 있는 나인홀 규모의 ‘어프로치와 퍼트’ 레이아웃이었다. 실제로 1958년에 만들어진 오거스타의 파3 코스와 비슷한데, 그것보다 짧은 코스를 생각하면 된다. 1933년에 매켄지는 조금 더 긴 쇼트 코스의 설계도를 그렸다. 2460야드 정도의 18홀 레이아웃이었다. (설계도상에서 가장 긴 홀이 190야드이고, 가장 짧은 홀은 60야드였다.)

그리고 1번홀의 티와 18번홀 그린 사이의 공간(한때 연습에 사용되었던 경사진 공간)에 챔피언십 코스의 19번홀을 90야드 길이로 추가하고 싶어 했다. 그가 로버츠에게 보낸 편지에 썼듯 “보비 존스와 몇몇 이사들이 내기에서 패한 사람이 판돈을 두 배로 올려 돈을 되찾을 기회를 노릴 수 있도록 19번홀을 진짜로 조성한다면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걸 실행에 옮길 돈이 없었다.  

그러나 조지아내셔널의 자금은 넉넉하고, 매켄지의 18홀 어프로치-앤-퍼트 코스를 지금의 파3 코스 자리에 짓는다. 존스가 실제로 높이 평가했으며 스케치를 하기도 한 파3 홀(잉글랜드 로열리덤 옆에 있는 세인트앤스올드링크스의 9번홀)을 모델로 삼아 남성용 코스에 19번홀도 추가했다. 회원들은 결산할 내기가 없더라도 이따금 칵테일 시간에 그곳에서 플레이를 한다.  

▲ 초창기_그들에게는 윌리스 어빈(위)이라는 건축가의 설계대로 대규모 클럽하우스를 지을 만한 자금이 없었다. PGA시니어스챔피언십의 처음 두 대회가 1937년과 1938년에 오거스타내셔널에서 열렸다. 클럽은 이 대회의 영구 개최지가 되는 것을 고려했다.
▲ 초창기_그들에게는 윌리스 어빈(위)이라는 건축가의 설계대로 대규모 클럽하우스를 지을 만한 자금이 없었다. PGA시니어스챔피언십의 처음 두 대회가 1937년과 1938년에 오거스타내셔널에서 열렸다. 클럽은 이 대회의 영구 개최지가 되는 것을 고려했다.

◇ 부동산 개발

존스와 로버츠는 매리언 홀린스가 파사티엠포를 지으면서 그랬던 것처럼 코스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한 주택 부지를 팔아 오거스타내셔널의 기금을 충당하려 했다. (매켄지 부부는 실제로 파사티엠포의 한 필지를 구입했다.) 매사추세츠 브루클린에서 유명한 조경개발사인 옴스테드 브라더스에서 제출한 오거스타내셔널의 개발 초안에는 24개의 주택 부지가 포함되었고, ‘향후 개발’용으로 지정한 지역도 여러 군데 있었다.  

지금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지만, 20년 동안 마케팅을 했는데도 실제로 오거스타내셔널의 필지를 구입한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회원이었던 몽고메리 해리슨은 인접한 세 필지를 구입해서 1번홀의 그린을 굽어보는 커다란 벽돌 주택을 지었다. 로버츠는 후에 전반적인 부동산 계획을 후회했고, 끝내 해리슨이 지은 그 집을 구입해서 철거했다. 로버츠가 1977년에 목숨을 끊기 전에 한 마지막 행동 가운데 하나가 1번홀 티까지 걸어가서 그 집이 실제로 사라졌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지아내셔널에서는 부동산 판매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해리슨의 집만 한 규모의 주택들이 여러 필지에 완성된다. 프리먼 고스덴(‘아모스-앤-앤디’의 그 아모스이며 로버츠의 절친이자 조지아내셔널 초창기 회원인)은 11번홀(오거스타내셔널의 2번홀에 해당하는)을 굽어보는 두 필지에 커다란 집을 짓는다. 1995년에 어느 부자 회원이 고스덴의 미망인에게서 그 집을 매입하고 규모를 두 배로 늘린 다음 옥상에 헬기 이착륙장을 설치한다.  

◇ 골프 명예의 전당

뉴욕주 쿠퍼스타운에 있는 야구 명예의 전당은 1939년에 문을 열었다. 미국프로골프(PGA)는 자체적인 전당을 만들어서 보비 존스를 포함한 전설적인 골퍼 몇 명을 헌액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PGA의 전당은 건물도 없고, 건물을 짓기 위한 설계도조차 없었다.  

로버츠는 골프 명예의 전당이라는 개념이 마음에 들었고, 그 건물이 들어서기엔 오거스타내셔널이 제격이라고 믿었다. 그가 선호한 위치는 클럽이 8년 동안 팔려고 했지만 실패한 주택 부지 가운데 한 곳으로, 10번홀 그린에서 동쪽으로 250야드 거리에 있는 6에이커의 부지였다. 로버츠는 존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곳에 명예의 전당이 들어선다면 방문객들이 코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며, 코스에서 플레이하는 회원들에게는 매력적인 건물이 한눈에 들어올 것”이라고 썼다.

로버츠에겐 그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1941년에 쓴 글에서 실제로 그렇게 밝히기도 했다. “그걸 생각할수록 명판이나 흉상을 주르륵 늘어놓고 대중에게 그것밖에 보여줄 것이 없는 건물이라면 지루하고 가치 없는 프로젝트로 드러날 것이고, 골프 지도자들을 찬양하려는 시도 외에는 존재의 이유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그들의 명성에 과연 보탬이 될지 의문이었다.”

그는 또 한쪽 건물에는 “자동으로 작동하는 영사기를 설치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는데, 25센트짜리 동전을 넣으면 위대한 교습가들의 레슨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대편 부속건물은 도서관과 서점으로 꾸밀 수 있었다. 방문객들이 오거스타내셔널 코스에 대한 기념 책자와 엽서를 구입하고, 도서관에 소장된 일부 서적을 ‘대중적인 가격의 제작본’으로 구입할 수도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로버츠는 “명예의 전당을 중심으로 축소판 오거스타내셔널 코스를 조성해 연습용 피치-앤-퍼트 코스로도 활용한다면 조경적 측면에서도 대단히 매력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코스를 축소해서 그대로 재현할 생각이었다. 라운드 비용으로는 1회에 25센트를 제안했다. 그리고 존스의 구상을 기반으로 ‘대단히 매력적인’ 퍼블릭 드라이빙 레인지를 만드는 것도 제안했지만, 전쟁이 일어났고 평화를 되찾은 다음에는 로버츠도 존스도 흥미를 잃은 후였다.  

하지만 조지아내셔널에서는 그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1939년 말에 시작된 작업은 로버츠가 묘사한 그대로 완성되었다. 자금은 새로 가입한 제임스 미들턴 콕스라는 회원이 지원했다. 그는 신문 발행인이자 오래전에 오하이오주 주지사를 세 차례 역임한 사람이었다(실제로 로버츠는 존스의 대형 동상을 세우겠다는 콕스의 아이디어를 단념시키기도 할 겸, 그에게서 거액의 기부를 받아낼 계획을 세웠다). 골프 투어 관광객들은 그 전당을 좋아하고, 이따금 실제 코스에서 플레이를 하는 존스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 전당은 지금도 관광 명소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가장 인기가 높은 곳은 거대한 월드 투어 건물인데, 방문객들은 랩어라운드 스크린과 연결된 첨단 시뮬레이터를 통해 마치 앨리스터 매켄지가 만든 위대한 코스(사이프러스포인트, 라힌치, 로열멜버른, 조지아내셔널 등)에 실제로 간 것처럼 플레이를 해볼 수 있다.

▲ 역사를 위해 남겨준 자리_오거스타내셔널의 공동설립자인 클리퍼드 로버츠는 한동안 골프 명예의 전당 설립에 골몰했었다. 그는 현재의 11번홀 챔피언십 티잉 에어리어 왼쪽에 있는 언덕이 전당을 건립할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다. 조지아내셔널에서 플레이를 즐기는 골퍼들은 전당을 찾은 방문객들의 환호성을 듣곤 한다. 토너먼트 참가자들도 그 역사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 역사를 위해 남겨준 자리_오거스타내셔널의 공동설립자인 클리퍼드 로버츠는 한동안 골프 명예의 전당 설립에 골몰했었다. 그는 현재의 11번홀 챔피언십 티잉 에어리어 왼쪽에 있는 언덕이 전당을 건립할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다. 조지아내셔널에서 플레이를 즐기는 골퍼들은 전당을 찾은 방문객들의 환호성을 듣곤 한다. 토너먼트 참가자들도 그 역사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 US오픈

존스가 처음에 품은 구상은 US오픈을 개최할 수 있는 코스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이 대회는 일리노이에서 더 내려간 남부에서는 열린 적이 없었다. 1933년 초에 그와 로버츠는 미국골프협회(USGA) 토너먼트 위원회의 회장을 맡고 있던 프레스콧 부시(Prescott Bush)를 오거스타내셔널로 초청했다. 부시는 두 차례 라운드를 했고 코스도 마음에 들었지만, US오픈을 개최할 준비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만약 오거스타내셔널에서 대회를 개최하면 그 시기는 날씨가 가장 적절하고 인근 리조트에도 투숙객들이 남아 있는 3월 말이나 4월 초가 되어야 할 거라고 지적했다. 당시의 통상적인 일정보다 거의 석 달이 빠른 시점이었고, 날짜를 그렇게 변경하려면 지역 예선 시스템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했다.

USGA의 허버트 자크(Herbert Jaques) 회장은 존스와 로버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까운 장래에 이런 변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호의적이지만 1934년에 그걸 시도하는 것은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거스타내셔널은 기다릴 수 없었다. 로버츠가 서두른 가장 큰 이유는 US오픈이 잠재적인 회원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테고, 오거스타는 회원 모집이 절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픈을 유치할 수 없다면 자체적인 토너먼트를 개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첫 번째 오거스타내셔널인비테이션토너먼트는 1934년 3월 말에 열렸다. 마스터스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건 1939년이었다.  

그러나 조지아내셔널에서는 프레스콧 부시의 방문이 대성공을 거둔다. 그는 코스가 너무 마음에 들고, 그와 자크는 대회 개최에 필요한 USGA의 예선 일정 변경을 기꺼이 감수한다. 1934년 US오픈은 메리언이 아닌 오거스타에서 봄에 열리고, 그 후로도 10년에 한 번꼴로 이곳을 다시 찾는다. US아마추어와 US여자오픈도 조지아내셔널에서 종종 개최된다.  

1934년 US오픈이 조지아내셔널에서 열린 데 따른 여파 가운데 하나는 존스가 기대를 모았던 대회 복귀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30년에 USGA는 스폴딩 &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그가 아마추어의 지위를 상실했다고 결정했다. 그는 한때 ‘클럽에 소속된 못 배운 하인’이라고 칭했던 골프 프로의 자격으로 대회에 출전할 마음은 없었다. 로버츠는 제1회 마스터스 때 토너먼트의 프로그램을 비롯한 다른 자료에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분을 짓지 않음으로써 그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했지만, USGA는 그렇게 할 리가 없었다. 조지아내셔널이 처음으로 유치했던 그해 US오픈에 존스는 우아한 주최자이자 모두가 우러러보는 관람객으로 참여하는 데 만족했다.  

조지아내셔널에서 열린 1934년 US오픈의 또 다른 결과는 그해 메리언의 실제 우승자였던 올린 두트라(Olin Dutra)가 이곳의 참가자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브렌트우드컨트리클럽의 헤드 프로였던 터라 그 시기에는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탓이었다(실제로 그는 제1회 오거스타내셔널인비테이션토너먼트에 참가해달라는 로버츠의 초대를 거절하며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제가 속한 클럽에 대한 의무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형편이니 귀하의 초대를 거절해야 하는 처지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지아내셔널에서 열린 첫 US오픈의 첫 우승자는 진 사라젠이었다. (그는 메리언에서 열린 US오픈에서 두트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사라젠은 제1회 오거스타내셔널인비테이션토너먼트에 불참했는데, 조 커크우드와 함께 남미에서 이벤트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행사를 계획했던 커크우드는 US오픈이었다면 일정이 겹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 단판 승부_앨리스터 맥켄지는 내기가 무승부로 끝날 경우에 승패를 가릴 수 있도록 9번홀과 18번홀 사이에 90야드 파3 규모의 19번홀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는 보비 존스가 좋아했던 세인트앤드올드링크스의 9번홀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만약 그 계획이 그대로 진행되었더라면 미래의 토너먼트 위원회에서 이곳을 플레이오프에 활용하고, 그랬다면 래리 마이즈의 칩 샷이 그대로 홀인하거나 버바 왓슨의 갭 웨지 샷이 휘어지는 일 없이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까? 다른 건 몰라도 패트런들의 왕래에 영향을 미쳤을 건 틀림없다.
▲ 단판 승부_앨리스터 맥켄지는 내기가 무승부로 끝날 경우에 승패를 가릴 수 있도록 9번홀과 18번홀 사이에 90야드 파3 규모의 19번홀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는 보비 존스가 좋아했던 세인트앤드올드링크스의 9번홀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만약 그 계획이 그대로 진행되었더라면 미래의 토너먼트 위원회에서 이곳을 플레이오프에 활용하고, 그랬다면 래리 마이즈의 칩 샷이 그대로 홀인하거나 버바 왓슨의 갭 웨지 샷이 휘어지는 일 없이 전혀 다른 역사가 펼쳐졌을까? 다른 건 몰라도 패트런들의 왕래에 영향을 미쳤을 건 틀림없다.

◇ 마스터스

1937년에 오거스타에 있는 한 호텔에서 회의가 열렸다. 노령의 프로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PGA에서 시니어 리그를 창설하고 55세 이상의 선수들이 참가하는 전국 챔피언십을 열기로 결정했다. 오거스타내셔널은 그 토너먼트를 개최하겠다고 제안했고, 초대 PGA시니어스챔피언십이 그해 11월 마지막 날부터 12월의 처음 이틀 동안 그곳에서 열렸다.  

오거스타내셔널의 창설 멤버이자 당시 부회장을 맡고 있었던 앨프리드 세버린 본(Alfred Severin Bourne)이 은제 트로피 제작을 위한 1500달러를 기부했고, 참가자들의 음료수 비용도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쁜 일이었고, 나이 든 분들이 골프를 즐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클럽의 총지배인이었던 앨리 버크먼스(Allie Berckmans)는 대회 직후 한 회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상금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본 씨가 기부한 컵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영광의 주인공은 족 허치슨(Jock Hutchison)이었다. 이듬해에도 오거스타내셔널에서 토너먼트가 열렸고, 그 대회에서는 프레드 맥리오드(Fred McLeod)가 18홀 플레이오프에서 오토 핵바스(Otto Hackbarth)를 꺾고 우승했다. 1939년에 시니어스챔피언십은 정규 후원 계약을 체결하고 플로리다로 개최지를 옮겼다. 1963년에 허치슨과 맥리오드는 마스터스의 첫 ‘명예 시타자’가 되었다.  

조지아내셔널에서는 시니어스챔피언십이 대성공을 거두자 그 대회의 영구 개최지가 되겠다는 존스와 로버츠의 제안을 PGA도 받아들인다. 존스는 1971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토너먼트의 명예 회장을 역임한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선수들을 위해 바비큐 파티를 열고 전년도 우승자와 연습 라운드를 함께 한다. 본 컵은 윌리스 어빈이 설계한 클럽하우스의 웅장한 로비에 전시된다. 1939년에는 대회 규모를 72홀로 확대하고, 존스와 조지아내셔널은 그 토너먼트에 공식 명칭을 부여한다. 그건 바로 마스터스라는 이름이다. 

글_데이비드 오언 / 일러스트레이션_바이올렛 프랜시스, 브라이언 크리스티 디자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잡지사명 : (주)스포티비골프다이제스트    제호명 : 스포티비골프다이제스트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2, 6층 ㈜스포티비골프다이제스트    사업자등록번호: 516-86-00829    대표전화 : 02-6096-2999
잡지등록번호 : 마포 라 00528    등록일 : 2007-12-22    발행일 : 전월 25일     발행인 : 홍원의    편집인 : 전민선   개인정보보호책임자 : 전민선    청소년보호책임자 : 전민선
Copyright © 2024 스포티비골프다이제스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ms@golfdigest.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