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강 칼럼_설계생활자] ‘파72’라는 자기 속박

2024-06-05     서민교
▲‘골프

골프에 공식이 없는 것처럼 골프 코스에도 정해진 규칙은 없다. 파72가 정답이 아닌 것처럼.

홀인원 보험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골퍼가 친구들과 라운드를 했다. 오랜만에 친구들도 만났겠다, 그날따라 샷감도 좋아 한껏 들뜬 기분에 파3홀에서 홀인원을 기록했다. 모두 난리가 났다. 처음 홀인원을 한 골퍼는 신이 나서 남은 홀을 왁자지껄하게 보내고 그늘집에서 축하주를 마시며 흥에 겨웠다. 기분 좋게 라운드를 마치고 그날 라운드 비용 전체를 호기롭게 계산했다. 캐디에게도 꽤 많은 팁을 줬다. 골프장에도 감사의 떡을 보냈다. 모든 것이 아깝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았다. 홀인원을 하면 ‘3년 운수대통’이라는 말도 있고, 홀인원 보험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도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골프장으로 홀인원을 한 골퍼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사의 전화가 아니라 아주 흥분한 상태에서 항의 전화를 한 것이다. 화가 잔뜩 난 이유가 뭘까. 보험사에서 보험금을 지급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 그 이유가 보험 규정에 적혀 있는 보험금 지급조건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험약관 가장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보험금 지급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8홀, 파72 정규 골프장에서 홀인원을 한 때에만 보험금을 지급한다.’ 그가 홀인원을 한 오렌지듄스송도골프클럽은 18홀, 파71 코스였다. 왜 골프장을 파71로 만들어서 홀인원을 했는데도 자기가 보험금을 못 받게 되었냐는 원망과 항의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 골프장은 대상지 여건상 파71로 구성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고 골프장 홈페이지, 스코어카드에도 이미 공지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오히려 골프장에서 홀인원을 한 골퍼에게 파71 코스인 것을 모르고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라운드한 그날뿐만 아니라 보험사에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몰랐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 ‘파’는 무엇인가

파(Par)는 골프 코스 각 홀의 규정 타수다. 미국골프협회(USGA)에서는 파를 ‘숙련된 골퍼가 주어진 홀에서 달성할 것으로 예상하는 타수로, 일반적인 기상 조건하에 퍼팅 그린에서 두 번의 스트로크를 하는 플레이’로 정의한다. 즉, 파4홀에서 네 번의 스트로크로 골프공을 홀에 넣는 스코어가 파다. 공식적으로 파는 1911년 USGA 골프 사전에 처음 등장했는데, 단어 자체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존재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Par’는 평등을 의미하는 16세기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1880년대의 영국 골퍼들은 파를 ‘그라운드 스코어’라고 부르곤 했다. 이것은 나중에 ‘보기(Bogey)’라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1900년대 이전에 사용된 파는 보기와 같은 의미로 쓰였지만 실제로는 보기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는 주어진 홀의 이상적인 스코어를 식별하는 데 사용되었고, 보기는 레크리에션 골퍼가 만족할 스코어를 설명하는 데 쓰이는 용어로 정착했다. 

파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는 홀의 길이다. USGA에서 파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홀의 길이는 1911년 처음 만들어진 후 1917년에 변경되었고, 마지막으로 1956년에 업데이트되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골프 기술의 혁신적 발전을 고려해보면 더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모든 코스 설계가들이 USGA 기준을 엄격하게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USGA에서 권장하는 이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파별 권장 기준은 남성 기준으로 파3 250야드 이하(약 228m), 파4 251~470야드(229~430m), 파5 471야드 이상(431m 이상)이다. 대부분은 이런 범위 내에서 파를 적용하지만, 종종 설계가의 의도적인 홀 배치, 지형 및 기후 조건 등에 따라 권장 기준을 벗어나는 사례도 있다.

각 홀의 길이를 측정하는 방법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제일 뒤의 티 중앙에서 그린 중앙까지를 수평 기준으로 측정한다. 수평 기준이기 때문에 실제 플레이 거리는 오르막, 내리막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려는 코스 레이팅 산정 때 반영된다. 직선 홀이 아닌 도그레그 홀이면 티에서 T.P(Turning Point,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I.P(Intersection Point) 사용)까지를 먼저 측정 후 T.P에서 그린 중앙까지를 산정해 합산한다. 이 경우 설계가가 지정한 T.P 위치를 정확히 반영해 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 총 전장이 짧은 코스에서 홀 길이를 과장하기 위해 도그레그 홀의 T.P 지점을 최대한 홀 길이가 길게 나오게 측정하는 것은 잘못된 측정 방법이다.

◇ 파 구성은 ‘옴니버스 영화’ 같다

각 홀의 파를 결정하는 것은 이야기가 물 흐르듯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한 편의 소설이나 영화 줄거리를 짜는 것과 같고, 서정적인 노래를 만드는 것과 같다. 코스 설계가는 루트 플랜 단계에서 18홀 각각의 파를 어떤 순서로 연결할지를 주어진 지형 조건, 코스의 성격, 전략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한다. 루트 플랜이 확정되면 코스 전체와 각 홀의 파는 고정이 된다. 

하지만 홀의 형태를 미세하게 다루는 조형 설계와 해저드를 통한 전략성 발전단계를 거치면서 설계가의 상상 속에서 코스 레이팅을 결정하는 홀 난이도는 끊임없이 조정되면서 완성돼 간다. 공사 단계에서도 이러한 난이도 조정 과정은 계속되어 현장에서 코스 조정이 계속 일어나며, 이 과정은 시범 라운드 기간까지 이어진다. 코스 설계가의 참여 범위를 공사용 설계도서 제출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공사 중 단계까지 확장해야 하는 이유라고 필자가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파72는 골프 공식이 아니다

코스 설계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18홀 배치가 가능한가’ ‘코스 제원은 파72에 7200야드 이상인가’이다. 18홀 배치는 가능한데 파72가 안 되거나 홀 총장이 7200야드를 넘지 않으면, 코스 설계가로서 무능한 건 아닌가 의심의 눈빛을 보내며 무슨 심각한 결함이 있는 코스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는 대부분 지형 조건이 좋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대부분 설계가들은 주어진 지형 조건을 가장 적정하게 활용하고 조정하는 범위 내에서 루트 플랜을 제시한다. 과다한 토공량과 인공 구조물을 설치하면 더 길고 넓은 홀을 만들 수도 있지만, 설계는 최상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최적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의뢰인이 강력히 원하고 비용 증가를 감내하겠다면 무리해서라도 파72 코스를 제안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무리한 설계안을 설계가가 먼저 제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리하게 파72를 고집하기보다는 지형에 가장 순응하는 코스 레이아웃이 어떤 것인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코스 레이팅을 정밀하게 조율해나가는 것이 현명한 코스 설계 과정이라 생각한다. 환경에 순응하는 코스일수록 홀 완성도는 높아지고 가장 자연스럽다. 

파와 혼동하는 것 중에 코스 레이팅이 있다. 코스 레이팅은 스크래치 플레이어가 정상적인 코스 상태와 기상 조건에서 플레이할 경우의 코스 난이도를 수치로 나타낸 값으로 소수점 한 자리까지 표시하며, 대한골프협회에서 측정한다. 한 골프장에서도 티마다 코스 레이팅이 다르다. 올해 한국여자오픈을 치른 레인보우힐스의 대회 코스인 남, 동 코스 티 세팅 기준 코스 레이팅은 79.6이었다. 평소 이븐파를 치는 골퍼가 거의 80타를 친다는 것이다. 

코스 설계가는 단순하게 홀 규정 타수로 표현되는 파보다는 섬세한 난이도를 표현하는 코스 레이팅을 코스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코스 설계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고민스럽고 힘들면서도, 새 코스가 만들어진 후 그 속에서 펼쳐질 다양한 플레이 상황을 상상하면 가장 신나고 즐겁고 기대감 넘치는 과정으로 변모한다. 

* 코스 설계가 이현강은 오렌지골프디자인 대표로서 <골프다이제스트> 코스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