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메이저 퀸의 자리에 올랐고 일본과 대만에서 투어 생활을 한 이은혜가 올해 스포티비(SPOTV)의 골프 해설위원이 됐다. 연습장과 필드에서 레슨도 하고 해설까지 맡은 그는 “아픈 게 사치”라고 말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은혜가 말하는 ‘골프 인생(La Vie de Golf)’을 살짝 들여다보자.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04년, KLPGA선수권대회에서 당시 프로 3년 차인 이은혜가 메이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해 상금 랭킹 4위로 시즌을 마친 그는 2005년부터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로 무대를 옮겼다.
목과 허리 디스크로 일본투어를 떠날 때까지 6년간 우승 기록은 없었지만 늘 상위권을 유지하던 선수였다. 이후 주니어 선수를 가르치면서 대만투어에서 3년간 활동하다 2016년을 마지막으로 투어 선수 생활을 접었다.
10년 이상의 투어 경험과 8년째인 레슨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부터 스포티비 JLPGA투어 중계의 해설을 맡았다. 이은혜의 말이다.
“그동안 방송에 관심이 많았지만 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어요. 해설 제의를 받고 리허설을 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어요. JLPGA투어는 제가 직접 경험한 투어라 아직도 코스를 보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올해는 다소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템포’에 관해 언급했다. JLPGA투어는 한국이나 미국과 달리 딜레이(지연) 중계를 하는 게 특징이다. 중요한 부분만 편집해서 방송으로 내보내기 때문에 템포가 무척 빠르다. 장면이 빠르게 넘어가기 때문에 멘트를 바로 치고 나오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머릿속으로 잠깐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이미 다른 장면으로 넘어간 후다.
“저는 골프라는 언어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통역해준다는 생각으로 해설에 임해요. 일단 길면 지루해요.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정보를 모아서 한 단어로 만들어 전달해야 합니다. 시청자 입장에서 쉽고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야 하죠. 자체 필터링이 가능한 새로운 형태의 번역기인 셈이죠.”
이은혜는 평소 레슨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정보가 혼재되어 있지만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애쓴단다. 수년간의 트레이닝을 통해 터득한 그 만의 노하우는 해설에서도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다.
“이제는 골프 선수든 아마추어 골퍼든 어느 단계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대략 머릿속에 그려져요. 코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입니다. 그 안에 스킬을 어느 정도 몸에 익히고 어떤 수준에 도달할지 눈에 보여요. 그것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바로 ‘꾸준함’입니다.”
그는 골프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렸다. 골프는 당장 보이지 않는 결과를 향해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훈련하고 단련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골프는 운동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스코어를 충분히 줄일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에요. 인내와 꾸준함이 필요한 운동입니다. 믿음을 갖고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원하는 바가 결과로 나타나는 게 골프입니다.”
요즘은 투어 선수로 활동할 때보다 더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 중이라고 그는 말한다. 평소에는 필드 레슨도 나가고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요즘 관심사는 건강이다.
“아픈 게 사치라는 마인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 제가 스포티비에서 골프 중계를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분이 많더라고요. 앞으로 JLPGA투어에 관한 다양하고 유용한 정보를 전달해드릴 테니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이은혜 해설위원이 바라본 JLPGA투어]
GD : 일본투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은혜 : JLPGA투어는 ‘그들만의 투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한 것 같다. 결코 나쁜 의미는 아니다.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놓고 어떠한 비바람이 불어도 그 굳건함이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철옹성이다. 좋은 것을 받아들여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본의 국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스템이다.
GD : 그들만의 투어라, 재미있는 표현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이은혜 : 우리나라는 미국 골프의 이론이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 일본은 자신들만의 색깔을 만들어나가려고 한다. 일종의 장인 정신이 그런 부분에서도 발휘된다. 어떠한 틀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고수하려는 힘도 강하고 그 결과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이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 것인데 가끔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해 상금 랭킹 1위를 한 선수의 스윙이 정석이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 미야자토 아이가 일본 무대를 석권할 때는 그의 스윙이 정석이었고 요코미네 사쿠라가 1위에 오를 때는 그의 스윙이 정석이라고 했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리 오버스윙이라고 해도 말이다.
GD : 일본의 갤러리 문화는 어떤가?
이은혜 : 투어의 분위기가 정말 조용하다. 갤러리도 마찬가지. 재미있는 건 의외로 골프를 잘 모르는 갤러리가 많다는 것이다. 가족끼리 피크닉을 즐기러 오는 이들도 매우 많다. 일정한 장소에 자리 잡고 앉아서 도시락을 먹고 생맥주도 한잔씩 하면서 선수들이 지나가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다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진정한 골프 팬이 된다. 내 팬 중에도 골프를 전혀 모르던 팬이 있었다. 갤러리로 온 그의 딸에게 내 인형을 선물한 게 첫 만남이었고 나중에 그는 대만까지 원정 응원을 와줬다. 지금도 메일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GD : JLPGA투어를 재미있게 보려면?
이은혜 : 안선주를 비롯해 신지애, 이보미, 김하늘 등 우리나라 선수의 활약상을 지켜보는 것은 당연히 재미있다. 세계적인 선수들이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조금 더 재미있는 시청을 위해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주목해볼 일본 선수도 많다. 특히 ‘황금 세대’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1998년에 태어난 고이와이 사쿠라, 마쓰다 레이, 가쓰 미나미, 아라가키 히나 네 명이다. 미야자토 아이와 요코미네 사쿠라가 이끌던 투어의 인기를 한국 선수들이 대신해왔지만 일본은 지금 이 황금 세대를 중심으로 세대교체를 꾀하고 있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JLPGA투어는 소재도 다양하고 재미있다.
GD : 그중에 누가 가장 기대되는가?
이은혜 : 사실 협회와 미디어가 황금 세대를 주목하고 있다지만 그들에 대한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고이와이 사쿠라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아직 우승은 없지만 2018년 상금 랭킹 8위에 올랐다. 평소 성격은 자신이 나온 사진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내성적인데 플레이는 무척 과감한 스타일이다. 무조건 핀을 공략하고 돌아가지 않는다. 필드에서는 거침이 없다. 대성할 선수라고 장담한다. 그에게서는 꾸준함이 보인다. 기회가 된다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그의 이름처럼 벚꽃(사쿠라)이 어떻게 만개하는지 지켜보고 싶다.
GD : 해설위원으로서 목표가 있다면?
이은혜 : 뻔한 흐름의 기존 해설이 아닌 나만의 특색이 있는 중계를 해보고 싶다. 선수의 심리나 히스토리 그리고 골프장의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전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해설. 이은혜가 하니까 색다르고 신선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고형승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tom@golfdige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