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골프를 이끌어갈 유망주 임채리를 만나봤다. 네 살 때 골프를 시작하며 신동 소리를 들었던 임채리. 잠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신동이 아닌 최고의 선수로 성장하는 그의 소신 발언을 함께 들어보자.
‘박세리 키즈’가 세계를 제패한 것도 이제 과거형이 됐다. 최나연, 박인비, 신지애, 이보미, 유소연으로 이어지던 ‘세리 키즈(1986~1990년생)’의 뒤를 이어 1995년 전후에 태어난 박성현, 고진영, 김효주, 이정은 등이 세계 무대를 주름잡고 있다. 국내는 2000년을 기준으로 앞뒤에 태어난 최혜진, 조아연, 임희정, 박현경 등이 각 부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 여자 골프의 패턴을 살펴보면 짧게는 2~3년을 주기로, 길게는 5년을 주기로 쟁쟁한 선수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왜 이런 패턴이 생기는 것일까? 골프를 시작하는 시기, 대략 초등학교 4~6학년(10~12세) 때 영향을 끼칠 만한 인물이 등장하거나 커다란 이벤트가 열린다. 그럼 그 시기에 맞춰 순간적으로 응집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박세리의 우승 장면을 보고 ‘나도 골프를 하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어 많은 아이가 클럽을 잡은 것처럼 말이다.
지난 20년간 한국 여자 골프를 움직인 키워드를 살펴보면 ‘박세리’, ‘신지애’, ‘박인비’, ‘박성현’ 등의 인물이 있고 ‘인천 아시안게임’,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프레지던츠컵’ 등 이벤트가 있었다. 그리고 ‘세계 랭킹 1위’, ‘올림픽 금메달’, ‘커리어 그랜드슬램’ 등 동기부여가 될 만한 몇몇 단어가 있었다. 이렇게 골프 역사에 획을 긋는 일이 발생하면 그 영향을 받은 세대가 형성된다. 그들이 자라 일정 실력을 갖춘 후 두각을 나타내면 그들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만들어진다. 이른바 ‘박세리 키즈, ‘박인비 키즈’, ‘밀레니엄 세대’, ‘올림픽 세대’ 등이 그것이다.
올림픽 세대의 등장 그리고 임채리
박인비가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그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은 아이들이 이제 중학생이 됐다. 올해 송암배아마추어골프선수권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이정현(운천중 1학년), 한국주니어골프선수권에서 중등부 1위에 오른 방신실(비봉중 3학년), KLPGA회장배여자아마골프선수권을 우승한 나은서(비봉중 2학년), 강민구배한국여자아마추어선수권 우승자 윤이나(창원남중 3학년) 등 고등학생 언니들을 무릎 꿇린 무서운 영 건들이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 또 한 명. 이미 초등학생 시절 여고부 우승자 선배를 꺾은 깜찍한 유망주가 있다. 용인 상하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임채리가 그 주인공. 그는 2016년 가누다배주니어대회에서 초등부 우승을 차지한 후 여고생 선배와 최저타 경쟁에서 승리하며 종합 1위에 올랐다. 올해 골드컨트리클럽(파73)에서 열린 경희대총장배 마지막 날 8언더파 65타를 기록하며 대회 최소타로 우승을 차지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임채리가 골프 클럽을 잡은 건 만으로 네 살 때다. 주말 골퍼인 아버지를 따라 연습장에 가서 자신의 키보다 큰 드라이버로 볼을 힘껏 날렸다. 난생처음으로 그가 부모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떼를 쓴 게 바로 골프 클럽이었다. 원하는 클럽을 선물로 받고 어머니가 레슨을 받던 코치까지 자신의 전담 코치로 만들었다.
1년 후 풀스윙까지 하게 되자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버지는 동영상 촬영을 했고 그것을 유튜브에 올렸다. 영상 제목에는 ‘골프 신동 임채리’라는 문구를 넣었다. 영상 속에서 아주 작은 체구의 어린 소녀가 힘을 제대로 실어 볼을 때리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영상을 찍고 있던 아버지는 연신 “좋아, 좋아”라고 말하며 딸을 격려한다.
그의 드라이버 샷 영상(www.youtube.com/watch?v= nTDyhjBPG_w)은 조회 수가 4만 회를 넘었다. 당시 영상을 본 볼빅의 문경안 회장은 수소문 끝에 부모의 연락처를 알아냈고 광고를 찍자고 제안했다. ‘볼빅의 미래’라는 슬로건을 걸고 프로 골퍼 한설희와 광고 영상을 찍었다. 반응은 좋았다. 그 이듬해에도 임채리는 볼빅의 광고 모델로 발탁됐다.
수영? 골프? 아니 둘 다!
임채리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경기도 대표 수영 선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골프는 취미에 불과했다. 그의 주 종목? 놀라지 마시라. 접영이었다. 수영장에서 임채리의 인기는 대단했다. 어린아이가 물로 부드럽게 뛰어드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어른들은 초콜릿과 사탕을 건네며 앙코르를 외쳤다. 항상 수영장을 다녀오면 간식이 한 아름이었다.
어느 순간 그는 수영과 골프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두 종목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기란 어렵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 재미있는 것을 선택했고 그건 바로 골프였다. 임채리는 골프 선수가 됐고 수영은 취미가 됐다. 골프와 상극이라며 말리는 코치도 있었다. 하지만 골프를 하다가도 충분히 연습했다고 느끼면 그때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스트레칭하는 것만큼 몸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임채리의 말이다.
“골프를 시작한 후로 시간이 잘 남지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 다른 걸 하고 싶다면 저는 가장 먼저 수영장에 갑니다. 지구력도 강화할 수 있고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무엇보다 재미있어서 좋아요.”
감각과 메커니즘의 사이
골프를 시작한 후로 경기장에서 선수들의 플레이를 직접 보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막상 갤러리로 경기를 보고 있으면 직접 플레이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몸이 근질거렸다. 결국 임채리는 대회장보다 연습장을 찾는 걸 더 즐기고 있다. 두세 시간 연습하더라도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요즘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시간이 정말 짧다고 느껴져요. 지금은 공부와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입니다. 그래도 잠은 자야 하니까 집에 가기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아쉬워요. 하루에 여덟 시간만 주어진다면 좋겠어요. 새롭게 익힌 동작을 제 몸이 받아들이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일반 고등학교보다 방통고 진학도 생각하고 있어요.”
특이한 점은 현재 그에게 코치가 없다. 그렇다고 부모에게 배우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셀프 코치를 하고 있다. 그의 말이다.
“레슨을 많이 받아봤어요. 그런데 그냥 혼자 생각하고 제 골프를 만들어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느꼈어요. 누군가 지적해서 스윙을 고쳤다면 그건 제가 생각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라도 잊어버릴 수 있죠. 제가 고민하고 궁리해서 답을 찾아내면 누가 알려주는 것보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제 몸은 오래 기억할 수 있어요. 지름길을 택할 수도 있지만 저는 제 몸이 기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신동이라 불리던 시절. 그때 벙커 샷 열 개 중 여덟 개를 모두 홀인할 정도로 감각이 뛰어났다. 주변에서는 “그때는 그럴 수 있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넘어가지만 임채리는 어쩌면 그것이 골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떤 공식에 의한 것이 아닌 감각에 의한 것 말이다. 그가 코치 없이 혼자 연습하는 이유도 그때의 감각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느끼는 대로 한번 쳐보려고요. 지금까지 메커니즘에 관해 배웠으니까 이제는 감각적으로 골프를 대해보려고 합니다. 기본기를 바탕에 두고 그다음에 감각을 살려 살을 붙여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임채리표 골프요? 그건 아마 감각과 메커니즘의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임채리는 셋업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키가 커도 그 메커니즘은 절대 변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셋업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계속해서 그의 말이다.
“몸에 무리가 가는 게 느껴지거나 약한 부분이 있다고 느껴지면 그 부분은 웨이트 트레이닝과 수영을 하면서 강화합니다. 몸의 밸런스가 무너질 경우에도 수영이 정말 좋아요. 그리고 큰 근육이 아닌 작은 근육을 강화하다 보니 부상 없이 골프를 더 잘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행복이란 게 뭘까?
중학교 2학년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임채리의 생각은 상당히 어른스럽다. 그는 다치지 않고 롱런하는 골퍼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즘 행복의 정의를 나름대로 찾고 있다고 했다.
“좋은 스코어를 낸 임채리는 예쁘고 좋지 않은 스코어를 낸 임채리는 예쁘지 않다면 저는 예쁘지 않아야 할 날이 훨씬 많아요.”
의심스럽겠지만 그는 2005년생이 맞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또 다른 행복론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주말에 재미있게 놀기 위해 주중에 일을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틀만 행복하기 위해 남은 5일이 불행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주말을 준비하는 5일도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일주일 내내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한편으로 그것을 즐기는 것이죠. 대회에 나가서 성적이 좋지 않을 때도 많아요. 예선에 떨어져도 예쁜 코스를 바라보며 스파게티를 먹으면 행복해요. 세상이 무너진 건 아니잖아요.”
그는 코치가 없이 혼자 연습하기 때문에 연습장에서 다양한 구질을 습득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어느 순간 시도하던 샷이 성공하면 행복의 비명을 내지른다. 그리고 거리가 늘 때는 항상 그런 희열을 느낀다.
“최근에 친구에게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굉장히 쉽게 ‘그냥 어깨만 돌려’라고 말했어요. 그렇게 해봤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거리가 10m가 늘었어요. 정말 짜릿했죠. 그렇게 주변의 누군가로부터든 영감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것도 저만의 행복입니다.”
임채리는 자신이 현재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게 최선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있다.
“정말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을 겨를이 없어요. 열심히 하면 언젠가 성적은 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열심히 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골프에 관한 걱정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이 ‘아모르 파티(Amor Fati)’라고 했다. 가수 김연자가 오버랩되면서 피식 웃었지만 어린 친구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니 적잖이 당황스럽긴 했다. 아모르 파티는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사상 중 하나로 ‘운명애(運命愛)’를 뜻한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운명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개척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창조성이 발현된다고 믿는 것이다.
“일단 벌어진 일이니까 거기에 불만을 가져봐야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저는 중간에 무언가를 포기하면 다른 일을 시작해도 똑같이 힘들기 때문에 또 포기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주어진 운명을 즐기는 게 가장 현명한 것이죠.”
멋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
골프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임채리의 롤모델은 타이거 우즈였다. 무엇보다 그의 골프에 관한 열정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PGA투어에서 그렇게 많은 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노력했다는 것이고 수술을 하고도 계속 선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열정이 있다는 것이죠. 물론 우승 자체만으로 타이거 우즈가 좋다는 게 아닙니다. 그 우승을 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 자신의 골프에 관한 연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였죠. 뒤에 숨겨진 그의 노력을 꼭 닮고 싶어요.”
최근 타이거 우즈의 경기 영상을 보다가 또 한 번 그에 대한 경외심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갤러리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걸어가던 우즈의 발을 친 영상이었다.
“타이거 우즈가 트러블 샷을 하고 난 후의 장면이었어요. 갤러리가 미끄러지면서 타이거 우즈의 발목 부분을 쳐서 하마터면 같이 넘어질 뻔한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즈는 갤러리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자신의 갈 길을 가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지 모르겠어요. 놀라웠고 그런 부분을 배우고 싶었어요.”
미국LPGA투어 진출, 그랜드슬램 달성과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게 골프 선수로서 목표라고 밝힌 그는 마지막으로 타이거 우즈를 한 번 더 언급했다.
“타이거 우즈처럼 멋있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그러기엔 제 이름이 너무 귀엽다고요? 그런 게 바로 반전이라는 겁니다(웃음).”
임채리
나이 : 14세
신장 : 171cm
학교 : 용인 효자초-상하중 2학년 재학 중 골프 시작 : 만 4세
드라이버 샷 거리 : 250야드
성적 : 가누다배주니어대회 종합 1위(2016), 녹색드림배, 일송배 초등부 1위(2017), 명지대총장배, 경희대총장배 우승(2019)
[고형승 골프다이제스트 기자 tom@golfdige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