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색도 입어봐야겠네요.”
인터뷰 촬영 당시, 파스텔 톤 의상을 입은 이다연이 신기한 듯 쳐다보며 거울을 이리저리 살폈다. 평소에는 빨강이나 남색 옷을 많이 입었단다. 파스텔 톤 옷은 안 어울릴 거라 지레짐작해 잘 찾지 않았다. 새 시즌에는 파스텔 톤처럼 많이 입지 않던 옷을 입어봐야겠다고 말했다. 옷뿐만 아니다. 이다연은 골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에도 도전하고 싶다.
■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제가 골프 선수로서 튀지는 않잖아요.”
이다연이 건넨 말 한마디에 깜짝 놀랐다. 너무 냉정한 자기 분석이 아닌가. 그래도 지난 5년간 매 시즌 우승 트로피를 들었는데. 하지만 이다연은 개의치 않았다. 프로 데뷔가 훌쩍 지난 골프 선수와 20대 중반 이다연이 공존하는 법을 깨달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새 7년 차다. 2016년부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정규 투어에 뛰어든 이다연은 데뷔 직후 꽤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6년 25개 대회에 출전했지만 14번이나 컷 탈락했다. 드라이버 입스로 고생하던 그는 절치부심하며 두 번째 시즌을 준비했으나 왼쪽 발목을 다쳐 반년을 대회도 못 나가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신인왕, 우승은커녕 시드 걱정을 하던 그해 9월, 거짓말처럼 팬텀클래식에서 첫 승을 거뒀다. 첫 승 후 그는 어깨에 날개를 단 듯 훨훨 날기 시작했다. 매 시즌 우승을 신고했고 상금 순위도 2020시즌(11위)을 제외하면 매년 톱10에 들었다. 탈락 위기에서 우승, 다승, 그렇게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다.
2022년 봄. 이다연은 대학 졸업을 위해 학업과 투어 생활을 병행 중이다. 마지막 학기지만 19학점이나 듣는다. 학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겨울에는 계절학기도 수강했다.
“월, 화요일에 수업을 몰아서 들어요. 진짜 뛰쳐나가고 싶더라고요. 재미요? 모르겠어요. 영어 때문에 망한 것 같아요.” 학교 얘기가 나오자 이다연은 깔깔 웃었다. “그래서 전지훈련도 국내에서 했어요. 뭐 훈련했다기보다 연습하다 학교 가고, 쉬고, 치료받고. 뭔가 집중해서 한 건 아닌데 이것저것 정신없이 살고 있어요.”
프로 선수의 삶은 너무 바쁘다. 운동하고, 연습하고, 대회에 출전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1년이 훌쩍 지난다. 모처럼 학교에 다니면서 평범한 20대 인생을 경험하니 어떠냐고 묻자 이다연이 되려 물었다. “평범한 게 뭘까요?”
“물론 제 직업이 평범하진 않잖아요. 근데 그 평범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골프 선수에게는 이게 평범한 일상인데. 전에는 ‘평범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지금은 내가 있는 일상이 평범하다고 생각해요.”
■ 골프는 잘 쳐도 스트레스
지난 6년 동안 이다연은 고민이 많았다. 투어에 데뷔하고 여유 없이 골프만 쳤다. 지칠 수밖에 없다. 여느 선수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20대 삶은 포기한 지 오래다.
“갓 투어에 데뷔했던 스물, 스물한 살 때는 마냥 급급했어요. 당장 내가 뭔가 해야만 한다, 이거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오직 골프. 어느 순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삶에서 저는 해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골프가 잘될 때도 말 못 할 힘듦이 있었다. “잘 칠 때도 아쉬웠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성적 때문이더라고요. 내가 스스로 매기는 점수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점수 때문에 항상 아쉬워하고 힘들었어요. 잘 쳐도 힘들더라고요. 이 선수는 이걸 잘하고, 저 선수는 저걸 잘하는데 저는 늘 부족한 느낌이었어요.”
2020시즌 개막전이던 효성챔피언십 이후에도 이다연은 2021년 상반기까지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우승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당시 이다연은 내가 과연 또 우승할 수 있을까 무수히 고민했다.
“작년에도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계속 불안한 마음이었거든요. 내가 또 우승할 수 있을까. 우승할 수 있는 선수일까.”
지금도 골프는 크게 즐겁지 않다. 치열한 경쟁에서 어떻게 즐겁게 성적을 낼 수 있단 말인가. “계속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근데 골프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뿌듯하기가 쉽지 않아요. 잘 쳐도 스트레스. 다만 기술을 배우고 연습을 굉장히 열심히 한 후에 대회장에서 딱 기술을 썼는데 잘 들어갔다. 그 정도가 골프의 즐거움 아닐까요?”
■ 고민 속 찾은 해답
3년 차이던 어느 날 이다연은 자신의 생각이 골프에 묻어난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골프만 잘해서는 안 되는구나’ ‘내 생활이 건강해야 골프도 잘 칠 수 있다.’ 성적에 연연하던 이다연에게 또 다른 숙제가 생긴 셈이다. 이다연만의 골프. 삶과 골프에 균형 잡기.
해답은 ‘내 것 잘하기’다. 경쟁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하고자 하는 걸 잘 해내는 것. “이제 내 것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해요. 내가 생각했을 때 오늘 좀 괜찮았다 싶으면 ‘그래, 나 잘했어’ 하고 넘어가요. 못 했어도 ‘오늘 최선을 다했어. 뭔가 배웠다’ 생각해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니까 성적이 더 잘 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2021년 한화클래식 우승을 떠올렸다. 20개월 만에 정상에 올랐다. 대회 최소타 신기록을 세우며 개인 통산 6승이자, 두 번째 메이저 대회 우승을 기록했다.
“그때도 내가 하고자 했던 게 너무 잘됐어요. 상대가 의식되기도 했지만 내 것만 생각했죠. 어떻게 해야 여유롭게 칠까, 여기선 어떻게 해나갈까만 고민했어요. 지금까지 우승했던 걸 떠올리면 흔들림 없이 내게 집중했던 것 같아요.”
골프에서 벗어나 이다연의 삶에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운전도 배우고, 그동안 받은 상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재테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꾸미고 싶었지만 바빠서 못하던 네일아트도 요즘은 받으러 다닌다.
“골프에 대한 고민이 많을 때는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근데 문득 ‘이거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 하나에 생활이 바뀌더라고요. 골프 외에는 다른 걸 못 하고 지냈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요. 그러니까 가족과의 관계, 친구, 골프를 대하는 자세도 다 바뀌었어요.”
■ 20대, 하고 싶은 게 많을 나이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할 때 이다연에게 아무거나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흔쾌히 승낙한 그는 ‘리틀 자이언트’를 써 내려갔다. 작은 거인. 작은 체구로 지난 6년 동안 보여준 장타 퍼포먼스에 붙은 별명이다. 팬클럽 이름도 ‘작은 거인’이다.
이다연이 그리는 골퍼 인생 목표는 무엇일까. 당장은 학업을 마치는 것이다. 학업을 해결하면 해외 진출도 생각하고 있다.
“골프 인생에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에요. 인생 살면서 아쉽지 않아야 하잖아요. 해외 진출을 안 해보면 아쉬울 것 같아요. 도전은 어렵겠지만 후회를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요.”
선수로서 꿈꾸는 마지막도 있다. “지금처럼 꾸준하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퍼포먼스적으로 더 보여주고 싶지만, 마음처럼 쉽진 않더라고요. 내 것에 집중해서 좋은 모습을 계속 보여드리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겠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이다연의 버킷 리스트
1. 여름에 제주도에서 서핑하기
- 한여름 제주는 대회장에서만 즐겼다. 제주 바다를 온전히 느끼고 싶은 마음.
2. 영어 배워서 능숙하게 말하기
- 어릴 때부터 영어 잘 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근데 클수록 배울 시간이 없어 실력은 여전히 제자리다.
3. 영국 중심으로 유럽 일주하기
- 예전 브리티시오픈 때 영국에 갔는데 너무 좋았다. 한 달 이상 유럽을 돌아보고 싶다.
4. 단체 생활(동호회) 해보기
- 골프는 개인 스포츠라 다 같이 무언가 해보고 싶다. 은퇴 해도 할 수 있을까.
5. 그림 배워서 집에 걸어놓기
- 피아노, 플룻, 하모니카, 축구, 농구, 골프…음악과 체육은 원없이 배웠는데 미술은 배워본 적이 없다. 그림 하나 제대로 그려보고 싶다.
이다연
나이 만 25세
프로 데뷔 2015년
성적 KLPGA투어 6승(메이저 2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