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세월의 관점에서 너무나 냉정하고 현실적인 명제다. 한 무대에서 오랜 기간 정상을 지키다 이 냉정한 명제를 마주하면 누구든 크고 작은 아쉬움과 후회, 심지어는 상실감으로 먹먹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의 아쉬움과 후회, 상실감을 느끼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지나온 나날 매 순간 오롯이 최선을 다했다면.
최근 은퇴를 선언하고 제2의 인생에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유소연이 그렇다. 그는 현역 은퇴를 생각하고, 결심하고, 이행하기까지 무거운 분위기 속 일련의 과정을 언급할 때도 시종일관 밝고 당찬 특유의 화법으로 말을 이었다.
무려 16년간 가열차게 활동했던 무대에서 홀연히 내려오게 된 심정은 어떨까? 유소연은 “시원섭섭한 감정 중 섭섭함은 전혀 없고 시원함만 있다”며 웃었다. “아쉬움과 후회가 없는 건 그동안 매 순간 정말 최선을 다한 덕분이다.”
1991년생이니 서른넷. 평균연령이 비교적 낮은 여성 투어 프로의 세계에서 그녀는 베테랑에 속한다. 2022년부터 두 시즌 동안 극도의 부진을 겪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은퇴를 결심한 건 단순히 나이와 부진한 결과 같은 껍데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의 행복을 기준으로 삼았다. 서른이 넘고 나서야 지금까지 해온 골프, 정확히는 투어 선수 생활이 어느 순간 자신의 행복을 저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번 판단이 서면 결정과 실행이 빠른 편인 유소연은 그렇게 은퇴 시점을 결정했고, 실행에 옮기며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개인·단체전에서 금메달을 거머쥐고 화려하게 프로에 데뷔한 유소연은 KLPGA투어에서 10승, LPGA투어에서 메이저 2승 등 6승을 기록했다.
KLPGA투어 맹활약을 등에 업고 초청 선수로 출전한 2011년 LPGA투어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며 단숨에 세계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이듬해 바로 LPGA투어에 데뷔해 보란 듯이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각종 국제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 선수로 활약했고, 2017년에는 6월부터 11월까지 19주 동안 세계 랭킹 1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녀는 꾸준하게 정상권에서 활약하며 고국 팬들의 밤잠을 설치게 한, 그야말로 위대한 선수였다.
유소연은 2017년 LPGA투어 메이저 대회 ANA인스퍼레이션(현 셰브론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둔 바 있는데, 은퇴 경기를 자신이 우승했던 의미 있는 동 대회에서 치르는 감격도 누렸다(유소연이기에 가능했던 일).
위대한 선수의 은퇴 선언에 많은 이들, 특히 LPGA투어 동료들은 진한 아쉬움을 눈물로 표출하며 마지못해 축하를 건넸다. 오히려 동료들이 더 슬퍼하고 정작 스스로는 무덤덤했던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은퇴를 맞이했으며,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고 있을까?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온 최근 근황부터 이야기해보자. SNS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요즘 지인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 같다.
조금은 게으름을 피우면서 별다른 일 없이 평화로운 시간을 주로 보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최근에 내 은퇴를 구심점으로 여러 가지 개인 약속과 모임을 많이 가졌다. 생각보다 만날 사람이 많아서 꽤나 바쁘게 지냈다. 제대로 편하게 쉬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계속 좋은 일과 좋은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으니 행복하다. 모레 떠나는 유럽 여행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것 같다.
지난달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를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지, 결정하기까지 어렵진 않았나?
2022년 초에 이미 은퇴를 고심했고, 어느 정도 결정했다. 골프를 하면서 내 인생을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불현듯 내가 골프 때문에(정확히는 투어 생활) 많은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이 무엇일까’라는 의문과 연결됐고, 골프 선수가 아닌 다른 삶으로 행복을 추구해보고 싶다고 느꼈다. 결정은 의외로 어렵진 않았다. 개인적으로 뭔가 판단이 딱 서면 빠르게 실천을 하는 편이다. 이제는 은퇴 후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지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시점인 것 같다.
마지막 대회 현장에서 많은 동료 선수가 슬퍼하고 아쉬워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국가대표 시절 동료이자 친한 선배 김도훈은 미국으로 건너가 은퇴 경기 캐디를 하기도 했다. 많은 이가 이렇게 함께해주는 건 어떤 느낌인가?
아,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나름 잘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웃음). 은퇴 결심과 동시에 나름 마음의 준비를 오래 해서 그런지 나는 정말 덤덤했는데 친구들이 많이 슬퍼했다. 모두들 골프 선수가 아니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지 못할 거라며 동료애로 나를 위로하고 축하해줬다. 골프는 개인 종목 운동이지만 많은 사람과도 충분히 교감하는 운동인 만큼 내가 운 좋게도 정말 좋은 직업을 가졌었구나 하고 새삼 느끼기도 했다.
정든 투어 무대를 떠나면서 그동안 함께했던 동료와 유소연을 우상으로 삼는 후배까지 현역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미련 없이 은퇴할 수 있었던 건 정말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꼭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지 않았으면 한다.
현역 시절 중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순간이 있다면?
음, 몇 가지가 떠오르는데…. 우선 우리나라에서 프로에 데뷔했을 때 프로 골퍼 유소연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두산매치플레이 우승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2011년 US여자오픈 우승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다. 한국에서 열린 2018년 UL인터내셔널크라운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국제 대회에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출전한 대회였고, 심지어 국내에서 열려 많은 팬과 관계자들의 기대와 관심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경기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정말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딱 맞는 분위기였다(웃음).
한 번 더 노력해보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나? 당신의 열정과 근성이면 자존심 회복을 위해 도전을 외쳤을 것 같은데.
글쎄, 다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투어에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보다 그런 에너지와 열정을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데 사용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내가 메이저에서 한 번 더 우승한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은퇴 후 하고 싶은 게 많을 것 같은데, 실현 여부를 떠나 전부 나열해본다면?
우선은 골프 중계 해설에 관심이 있다. 선수 입장을 대변하고, 선수가 돋보이는 해설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간혹 선수가 대회 중 황당한 실수를 하는 장면에서도 왜 그런 실수가 나왔는지 선수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식으로. 또 해외 투어의 외국 선수들을 보면 선수 생활을 중단하고도 법조계나 금융권 등 진로 변경이 수월하도록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여전히 운동에만 매진하는 경향이 짙은 국내 학원 체육 시스템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골프 행정 쪽에도 관심이 있다.
골프 설계가에도 큰 관심이 있는 걸로 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링크스 스타일 코스를 좋아한다. 다양한 스킬을 갖추어야 잘할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무대다. 거친 코스는 물론, 변화무쌍하고 강한 바람을 잘 이용해야 하는 등 일반적인 코스에서 플레이할 때보다 더 많은 변수에 대비해야 하는 시험 무대라는 점이 좋다. 새로운 기술과 경험을 접하고 실현하는 걸 좋아하는 나와 잘 맞는다. 유소연이라는 이름을 걸고 코스 설계를 해보고 싶다.
*유소연과 골프다이제스트코리아와의 인터뷰 전체 내용은 골프다이제스트코리아 6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