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에게 묻다, 갈림길에 선 한국 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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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에게 묻다, 갈림길에 선 한국 골프
  • 한이정 기자
  • 승인 2023.08.1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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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프가 변곡점을 맞았다. 막강하던 한국 여자 골프는 세계적 라이벌이 넘쳐나 최강자 자리를 위협받고 있으며, 남자 골프는 미국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 골프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7월 18일 기준 여자 골프 세계 랭킹에서 상위 20위권 내에 한국 선수는 고진영과 김효주뿐이다. 지난해 메이저 대회 KPMG위민스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전인지는 2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한때 톱10에 한국 선수가 절반을 차지한 시기가 있었다. 고진영, 김효주, 박인비, 김세영 등이 세계 랭킹 1위를 다퉜다. 매주 발표되는 세계 랭킹에 한국 골프 팬들이 집중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계 랭킹 1위 최장 기록을 갈아 치운 고진영에게만 관심이 갈 뿐이다.

여자 골프 상위 20위 중 미국이 3명으로 가장 많다. 한국에 이어 호주, 일본, 중국, 영국 선수가 2명씩 톱20 안에 들었다. 미국이나 일본, 태국, 중국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예전처럼 한국이 세계 여자 골프를 지배하던 시대는 지났다.

여자 골프 위기론은 예전부터 나왔다. 심심치 않게 들렸던 한국 선수들의 우승 소식이 뜸해지기 시작하면서다. 2022년만 하더라도 한국 선수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합작한 승수는 4승에 불과했다. 우승 가뭄이 전부는 아니다. 2015년 김세영을 필두로 2019년 이정은이 일궈낸 5년 연속 신인상 타이틀은 이미 2년 연속 태국에 넘겨줬다.

고진영이 1위를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골프 천재’ 김효주가 2020년 기량을 되찾아 2021년부터 LPGA투어에서 매년 우승하지 않았더라면, 세계 랭킹 10위권에 한국 선수는 아무도 없었을지 모른다. 지난 5월 열린 국가 대항전 한화라이프플러스인터내셔널크라운에서 6전 2승 4패로 쓰라린 예선 탈락을 맛본 후 ‘여자 골프 위기론’은 더욱 커졌다.

미국이나 태국, 중국은 한국과 정반대 분위기다. 미국은 넬리 코다와 렉시 톰프슨 등 인기 선수를 중심으로 앨리슨 코푸즈, 릴리아 부, 로즈 장 등 실력 좋은 젊은 선수들이 대거 등장해 이제 미국에서도 여자 골프가 흥행할 것이라는 핑크빛 미래를 예상하고 있다. 태국이나 중국은 쭈타누깐 자매, 펑산산의 뒤를 이을 젊은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국은 오히려 뒷걸음질 중이다. 실력 있는 여자 선수들은 해외 진출을 꺼린다. 남자 선수들은 넓은 해외 무대를 향해 달려가고 싶어 하지만,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후원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 저무는 여자 골프, 뜨는 남자 골프

“다음 세대가 없잖아요.” 여자 골프에 회의적인 평가가 쏟아지는 이유 중 하나는 새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박세리에 이어 박인비·김인경·최나연 등이 미국에서 활약했고, 신지애나 이보미·김하늘은 일본에서 한국 골프를 알렸다. 선배들의 모습을 본 김세영, 박성현, 전인지, 고진영, 김효주, 이정은 등이 미국으로 향해 대를 이었다.

지금은 한국 골프의 명맥을 이을 선수가 마땅치 않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이겨내고 최혜진과 안나린, 유해란이 LPGA투어로 갔지만 이들이 레전드의 대를 이어가기에는 역부족이다. 2000년대생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는 LPGA투어 무대에서 한국은 아직도 고진영, 김효주 등에게 기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뛰는 실력 좋은 선수들이 해외 진출을 주저하는 것도 명맥이 끊기는 이유 중 하나다. KLPGA투어 톱 선수들은 상금으로만 한 해에 5억원 이상 벌어들인다. 박민지는 2021~2022년 2년 동안 30억원 가까이 수익을 냈다. 인기 선수들은 스폰서 후원도 많다. 시드를 얻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거금을 들여 퀄리파잉 토너먼트(QT)를 뚫어야 하기 때문에 해외 진출은 후순위로 자연스럽게 미룬다.

남자 골프는 사정이 여자 골프와 정반대다. PGA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의 입지는 과거보다 탄탄해졌다. 김시우, 임성재, 이경훈, 김주형 등 ‘코리안 브러더스’의 활약 덕분이다. PGA투어 공식 SNS에 이들이 출연하는 건 일상이 됐고, 김주형이 스코티 셰플러와 생일 파티를 함께 한 건 미국 언론에서도 다룰 만큼 화제였다.

토미 플리트우드, 로리 매킬로이와 대회 중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주형.
토미 플리트우드, 로리 매킬로이와 대회 중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주형.

젊은 선수들이 활약하니 코리안투어 선수들도 해외로 눈을 돌린다. 김주형처럼 아시안투어를 병행하며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선수도 있고, 지난해 코리안투어에서 대상과 상금을 쓸어 담은 김영수는 DP월드투어 시드 1년을 획득해 유럽 무대에서 뛰고 있다.

코리안투어도 선수들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DP월드투어와 손을 잡았다. 국내에서 코리안챔피언십 대회를 공동 주관한 것은 물론, 업무 협약을 맺고 제네시스 포인트 상위 3명에게 DP월드투어 시드를 주기로 했다. 선수들에게는 해외 시드를 굳이 따지 않아도 되는, 혹할 만한 혜택이다.

미국에 있는 선수도 최고의 무대를 위해 이를 악물고 있다.  2021~22시즌에 PGA투어 시드를 잃었던 안병훈은 1년 만에 PGA투어에 복귀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과 라운드를 소화했다. 콘페리투어에서 실력을 다지고 이번 시즌 PGA투어에 데뷔한 김성현도 다크호스로 주목받고 있다.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이 성과를 내니 국내에 있는 선수들도 ‘나도 임성재, 김주형처럼 PGA투어를 누벼보고 싶다’는 목표를 세운다. ‘지옥의 레이스’라는 퀄리파잉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 레전드 4인이 말하는 한국 골프

한국을 대표하는 레전드 4인, 최경주·양용은·박세리·박인비에게 한국 골프의 현주소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물었다. 레전드 4인이 전한 많은 이야기 중 키워드는 육성과 환경, 도전 그리고 격려다.

 

- 육성

“이제 막 골프를 시작하는 친구들이 임성재나 김주형을 보면서 ‘나도 저 형처럼 되겠다’고 마음먹을 것이다. 선두 주자가 있으면 뒤따라가는 사람은 좀 쉽다. 열심히만 하면 선배가 열어준 길이 내 길이 되는 것이다. 그게 정말 중요하다.” _최경주

한국 골프가 위기론을 겪는 원인 중 하나는 레전드의 뒤를 이을 만한 선수들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여자 골프는 고진영, 김효주를 이을 주자를, 남자 골프는 김주형 다음으로 PGA투어에서 활약할 선수를 발굴해야 한다. 최경주는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와 손잡고 주니어 선수들이 어릴 때부터 대회에 나가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돕고 있다. 그는 “선수들이 AJGA 대회에 나서면서 ‘아, 골프로 미국에서 대학을 갈 수 있구나’, ‘콘페리투어나 PGA투어에 갈 수 있는 길이 다양하구나’를 깨닫는 걸 본다.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지면 마음도 커져서 목표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전했다.

최경주처럼 국내에서 주니어 양성에 팔을 걷어붙인 박세리는 주니어 선수에게 골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골프라는 스포츠가 성공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며, 끊임없이 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매력 있는 스포츠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자아를 실현하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골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또 선수 육성을 위한 구체적이고 탄탄한 커리큘럼과 좋은 선수를 발굴하는 것도 필요하다.

박인비는 “경험을 통해 골프를 잘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깨달아야 하고, 선배들이 은퇴 후 지도자가 되면 앞으로 골프를 시작하는 친구들이 더 체계적인 훈련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고 바랐다.

 

 

2008년 US여자오픈 박인비 우승 당시.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
2008년 US여자오픈 박인비 우승 당시.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

- 환경

“내가 어릴 때 환경이 지금과 엄청나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실전 라운드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주니어가 매트에서 샷 연습만 주구장창 한다고 해서 어떻게 실전 감각을 키울 수 있겠는가.” _박인비

한국에서 골프가 대중화됐지만, 그렇다고 선수들의 연습 조건이나 환경이 좋아진 건 아니다. 프로 선수도 골프장을 부킹하는 데 애를 먹는다. 특히 대회를 앞둔 골프장은 선수들도 부킹 전쟁을 벌여야 한다. 주니어 선수들은 더 열악하다.

레슨비도 비싼데 20만원을 호가하는 그린피까지 내야 하는 주니어 선수의 육성 환경은 개선이 필요하다. 그린피 할인은 고사하고, 마음껏 연습할 곳이 턱없이 부족하다. 어릴 적 미국에서 훈련했던 박인비의 말을 들어보자.

“하교 후 3시 이후 골프장에 도착해 쇼트 게임, 퍼팅, 샷, 9홀 라운드 등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비용도 비싸지 않았고, 골프장마다 주니어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한국 골프장은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미국처럼 무작정 주니어 골퍼를 도울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조금만 환경이 개선되면 좋을 것 같다.”

다른 레전드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최경주는 “한국은 아무래도 티 타임이 타이트하고, 코스를 사용하는 게 쉽지 않다. 태국은 골프장이 많고 접근성이 좋아서 사용하기 용이하다. 그런 조건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좋아진 점도 분명 있다. 박인비는 한국 골프 특성상 환경의 변화가 있기 어렵지만, 다양한 훈련을 통해 좋은 선수로 성장하는 데 확실히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시스템은 훨씬 체계적이다. 멘탈 트레이닝, 웨이트트레이닝, 미디어 트레이닝 등 예전에는 거의 골프만 했다면 요즘은 체계적으로 많은 걸 준비시킨다.”

 

 

프레지던츠컵 당시 한국 선수들.
프레지던츠컵 당시 한국 선수들.

- 도전

“해외에서 뛰는 선수가 많아져야 선수들끼리 시너지 효과도 나고, 대회마다 한국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낼 확률이 높아진다. 매주 특정 선수만 잘하기 쉽지 않다.” _양용은

최경주는 재단을 설립해 15년째 주니어를 양성하고 있다. 10대 선수를 직접 만나면 느끼는 바가 많다. 그는 “여학생들은 한국에 있고 싶어 하고, 남학생들은 PGA투어에 가길 바라더라. 물론 환경에 긍정적 변화가 있어서 그렇겠지만, 조금 더 세상을 넓게 보면서 실력을 키웠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미국 선수들이 잘하지만, 사실 부딪혀보면 별거 아니다. 안 될까 봐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부딪혀보길 바란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해외 선수들과 자주 맞붙는 기회를 갖는 것도 좋다. 조금 더 세상을 넓게 보면서 본인의 실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곡식이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듯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웃을 날이 올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여자 골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박인비도 후배들에게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젊은 선수들이 끊임없이 세계 무대에 도전해야 한다. 선수가 수혈되지 않으면 젊은 세대와 장기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더 많은 용기와 도전이 필요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골프는 완벽할 수 없는 운동이라 실패를 통해 단단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실패가 쌓여서 결국 내가 원하는 자리에 나를 올려줄 것이다.”

박세리 역시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선수들이 두각을 드러내면서 한국 선수들도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발전할 수 있다. 내 앞에 따라잡을 수 있는 우수한 상대가 있다는 건 스포츠 선수로서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각자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때 스포츠는 빛을 발한다”고 말했다.

 

 

박세리 은퇴 경기 때 포옹하는 박세리와 박인비.
박세리 은퇴 경기 때 포옹하는 박세리와 박인비.

- 격려

“최정상 위치에 있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길 바란다. 한국은 LPGA투어에 진출한 국가 중 역사가 짧은 편이지만, 지난 25년간 200승 이상을 합작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승수다. 우리 후배들은 꾸준히 잘하고 있다. 부담보다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시길 바란다.” _박세리 

세계 무대에서 뛰어본 레전드들은 당장 성적이 나지 않더라도 선수들에게 질타보다는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라고 당부했다. 양용은은 “미국에 진출해 있는 선수들이 열심히 해주고 있으나, 아직은 한국 팬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도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전했다.

특히 팬들의 관심과 더불어 스폰서의 적극적인 후원도 필요하다. 태국도 대표 맥주 회사 싱하그룹이 선수 후원에 발 벗고 나섰다. 연습장 등 인프라를 발전시키고 금전적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태국에 싱하투어도 창설했다. 태국 골프에서는 ‘키다리 아저씨’인 셈이다. 투자 효과는 크다. 쭈타누깐 자매에 이어 패티 타와타나낏, 아타야 티띠꾼, 짜라위 분짠, 재즈 와타나논, 파차라 콩왓마이 등이 탄생했다.

양용은은 “선수들은 개인적으로 해외 진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골프 협회나 스폰서의 적극적 도움이 필요하다. 선수들이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후원도 필요하다. 퀄리파잉 토너먼트에 한 번 출전하는 데도 1000만원 이상 경비가 필요하다. 한국이 해외 경쟁력을 키우려면 이런 도움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박세리도 후배 선수들을 격려했다. “타국에서 좋은 선수가 많이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우리 후배들 또한 부진한 게 아니라 꾸준히 잘하고 있다. 지금은 잠시 정체기일 수 있으나 앞으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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