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ING FOR ETERNITY [People : 1611]

아널드 파머가 골프계에 남긴 발자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글_톰 캘러핸(Tom Callahan)



완벽을 추구하다
“아널드와 내가 모든 걸 완벽하게 한 건 아니다.” 니클라우스는 말했다. “골프에서는 완벽을 추구하더라도 결코 그걸 이룰 수 없다.” 완벽이라는 주제에서 파머는 변함없는 성자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45년 동안 위니를 아꼈지만, 그는 모든 여자를 사랑했고, 적잖은 여자들이 그의 사랑에 응했다. PGA 챔피언인 밥 로스버그(Bob Rosburg)는 넉넉잖은 주머니로 투어에 참가하던 시절에 아널드와 한 방을 쓰곤 했는데, 한번은 유난히 흥분한 한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로스버그는 남자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널드 대신 총을 맞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침대는 창문 쪽이에요.” 2013년에 톰 왓슨은 여든네 살의 파머가 슈퍼모델인 케이트 업턴(Kate Upton)과 함께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을 패러디한 골프다이제스트의 표지에 불만을 토로했다. 파머는 농부의 뚱한 표정을 흉내 내며 건초용 갈퀴 대신 벙커의 고무래를 들고 있었다. “마치 노망든 노인네처럼 보인다”고 왓슨은 말했다. “곁눈질로 케이트를 훔쳐보면서 눈을 빛내는 사진을 찍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아니의 본모습을 잘 잡아낸 사진이 됐을 것이다.” 그는 그해에 공식 석상에서 단 한 번의 스윙도 하지 않고도 4000만 달러를 벌었고, 이듬해에도 다시 4000만 달러를 벌었다. 마지막 해까지 파머가 벌어들인 순수익은 6억8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최초의 슈퍼 스포츠에이전트라는 평가를 받았던 마크 매코맥(Mark McCormack)은 위대한 친구의 위대한 브랜드를 함께 구축했다. 매코맥은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름 성형을 하러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다. 파머는 광고와 건축, 의류, 자동차, 휘발유, 케첩, 세탁용품, 우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욋돈을 벌었다. 심지어 <투나잇 쇼>의 조니 카슨을 대신해 특별 진행을 맡기도 했다. 찰리 매카시(Charlie McCarthy) 이후 가장 어색한 진행이었지만, 방청객들은 좋아했다. 밥 호프가 주연을 맡았던 <콜 미 브와너(Call Me Bwana)>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빙 크로츠비와 페리 코모, 제임스 가너부터 잉글랜드의 왕 자리를 버리고 심프슨 부인의 남편이 된 에드워드와도 교우했다. 대통령과 라운드를 함께한 프로는 많지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생일 축하해요”라고 말한 건 파머뿐이었다. 파머는 베이힐과 라트로브, 이 두 곳을 오가며 지냈다. 노먼 록웰이 그린 그의 초상화는 라트로브에 걸려 있다. 아널드가 라트로브의 집에서 의자만 돌리면 창문 밖으로 유년기의 모습이 다시 펼쳐졌다. 1971년에는 아버지가 근무하면서 회원의 명확한 초대 없이는 라커룸이나 레스토랑, 바에 절대 발을 들이지 않았던 골프 코스를 인수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고개를 넘어 그곳에 가서 꿩과 토끼, 다람쥐를 잡았고, 그걸 근처의 개울에서 씻은 다음 밤새 소금물에 담가두었다. 언덕 끄트머리에 서 있던 늙은 떡갈나무가 쓰러졌을 때 줄기가 바스라지면서 꿀벌들이 자리를 잡았다. “‘잘 봐라, 아니.’ 아버지는 말했다. ‘이제 우리가 저 꿀을 엄마한테 가져다줄 거야. 하지만 5파운드짜리 설탕 두 봉지를 가져와야 해. 꿀을 가져오는 대신 설탕 두 봉지를 넣어줘야 벌들이 먹을 게 있을 테니까.’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때 내 나이가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이었다.” 어쩌면 그는 평생 꿀을 가져가고 그 자리에 설탕을 넣으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4년 5월13일에 그는 매사추세츠주의 한 주니어 골퍼에게 천 번째(어쩌면 만 번째) 편지를 썼다. 그 선수 형의 부탁이었다. “네이트에게, 너의 형인 애덤에게서 들었는데, 네가 뛰어난 골퍼이자 아주 좋은 동생이라더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톤힐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내가 해줄 조언을 귀담아듣는다면 즐겁고 보람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
✽정중함과 공손함은 시대에 상관없이 지켜야 할 원칙이고, 좋은 매너도 마찬가지란다…
“호건의 행동에 아널드는 큰 상처를 받았다.” 바이런 넬슨은 말했다. “일부러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호건은 무리 지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벤에게도 친구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열정이 대단하고, 실력도 뛰어났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는 걸 두려워했던 것 같다. 자동차 사고 이후, 다시 걷게 된 다음에 최고의 플레이를 선보였을 때 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바이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말을 해야 하는 타이밍을 아는 건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만큼 중요하단다….
“파머는 밤에 자러 갈 때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샘 스니드는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카리스마가 더 넘쳤다.”
✽규칙을 준수하며 이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를 생각하면 그의 손이 떠오른다.” 이건 레이먼드 플로이드의 말이다.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손. 그리고 그 눈도. 골프 코스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보지만 실제로 그들을 쳐다보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는 갤러리의 모든 사람과 개인적으로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그냥 시늉만 하는 게 아니었다.”
✽고맙다는 말을 할 시점과 그 말을 하는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출전한 메이저 대회에서 그와 한 조가 되었다.” 어니 엘스는 말했다. “벨러리브에서 열린 PGA 대회 때였다. 내가 그때 몇 살이었더라. 스물두 살? 금요일에 악수를 하는데(그 놀라운 손을 잡고) 이듬해에 베이힐에서 열리는 자신의 토너먼트에 오라고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현장에서 선수를 초대한 건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게 내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의 대회에서 결국 우승했을 때는 정말 기뻤다.” 엘스는 그 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다.
"파머는 밤에 자러 갈 때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카리스마가 더 넘쳤다." _샘 스니드

“나는 아널드의 집에 머물고, 그는 우리 집에 머물렀다.” 플레이어는 말했다. “그가 남아공으로 왔을 때 그를 데리고 금광 구경을 갔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었다. 다정한 숙녀였다. 나는 그의 아버지도 좋아했다. 모두의 말처럼 그는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 프로 선수들은 서로 경쟁한다. 우리는 경쟁자들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함께 웃고, 때로는 함께 울기도 한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우리는 함께 울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위해 플레이하는 것이다.” 1986년에 워싱턴 근교에서 열린 챔피언스 대회에서 파머는 5번 아이언으로 홀인원을 했고, 다음 날 오후에 같은 티에서 홀인원을 한 번 더 했다. “돌아보니 그린 옆에 게리가 서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멋진 샷을 하고 싶었다.” “그래, 그거다! 바로 그거다!” 플레이어는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것이든, 상대의 것이든, 승리의 순간을 어떻게 함께 나눌지 잘 알고 있었다.” 대학 생활의 행운을 빌며, 열심히 공부하기 바란다. 그럼, 이만.
여담이지만, 그는 자신의 사인이 너무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시장에서 거의 가치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기뻐했다. 1999년에 위니가 난소암으로 죽고 6년이 지났을 때 아널드는 키트를 만났다. 가족들이 두 번째 부인을 늘 반기는 건 아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아침을 함께 맞을 사람을 만났고 딸들과 손자들은 모두 기뻐했다. 파머 본인도 암 투병을 했고 전립선을 떼어냈지만 바지를 한 번 추어올리듯이 개의치 않고 일상을 이어갔다. 골프에서 그가 바란 건 아주 단순했다. “1번홀의 티잉 그라운드에 오르는 모든 핸디캡 20의 골퍼들은 이 게임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전해줘야 한다. 그리고 스윙 레슨을 받을 때마다 규칙과 에티켓에 대한 레슨도 받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지닌 것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는 자신의 대회에서 여덟 번 우승한 타이거 우즈에 대한 코멘트를 집요하게 요구받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말하겠다.” 그는 잠시 창밖을 응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누구라고 콕 집어내지 말자.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지 말자. 그저 골프나 다른 스포츠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대중과 공유하길 원하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어쩌면 다른 그 누구와도 공유하길 원치 않을 수도 있다. 이게 가장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말일 것 같다. 나는 내 인생을 대중에 공개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더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방식이 있다.” 2016년에 오크몬트에서 US오픈이 열렸을 때, 파머는 라트로브에서 비행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보잉의 회장과 아는 사이였다.” 당연히 그랬다. “그가 내게 747기를 몰게 해줬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고층 빌딩을 조종하는 기분이었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다”고 대답했다. “맨 위층에서 조종하는 것 같았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무명의 프로 선수인 샘 손더스 얘기에는 눈시울을 붉혔다. “내 손자로 사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할아버지가 남긴 평생의 업적을 따라가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2015년에 양탄자 위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오른쪽 어깨가 탈골된 이후, 파머는 놀랄 만큼 기력이 쇠한 모습으로 변했다. 안색은 창백한 수준을 넘어 잿빛이 됐다. 하지만 정신은 또렷했고 유머 감각도 여전했다. 해 질 무렵에 크고 노란 멀리건이라는 개와 산책을 하며 그는 말했다. “나도 조만간 늙을 거야.” 2009년에 펜실베이니아에서 보낸 사진 한 장이 스페인 북부에 도착했을 때 세베리아노 바예스테로스의 뇌종양은 잠시 진행을 멈췄다(완전히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아널드 파머가 내게 개 한 마리를 보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진으로. 멀리건이라는 이름의 그의 개.” 바예스테로스는 그 사진에 담긴 메시지가 사실은 자신을 위한 기도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의사가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나는 이제 멀리건을 사용하는 셈이다.” 세베도 파머처럼 래브라도 리트리버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해서 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리 트레비노는 말했다. “아널드가 메이저 대회에서 지나치게 일찍 힘이 빠진 이유는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후회는 없을까? “물론 거의 우승할 뻔한 네 번의 US오픈에서 실제로 우승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파머는 말했다. “아쉽게 놓친 두 번인가 세 번의 PGA에서도.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과연 다른 방법을 택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보자. 디오픈 다섯 번에 PGA 두 번, 마스터스 여섯 번 그리고 브리티시오픈도 두 번 우승하는 대신 친구들을 이렇게 많이 갖지 못한다면? 아니, 그러긴 싫다. 트로피는 넣어둬라. 밥호프 대회가 열린 팜스프링스에서 티오프를 했던 때가 기억난다. 앞선 두 라운드에서 플레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찍 나가게 됐다. 아마 아침 7시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잠옷과 가운 차림의 아니 부대가 나와 있었다.” 그는 겸손한 동시에 당당했다. 그는 서민적인 동시에 왕이었다. 아이스티와 레모네이드를 반반씩 섞었다. 그는 클럽하우스의 그릴 룸(홈코스든 아니든)을 오가며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처음 보는 사람이든 친구든) 실내에서는 모자를 벗으라고 말했다. 뜨겁게 불살랐던 87년 동안 그는 즐겁고 기품 있는 삶을 살았고, 복엽비행기를 몰고 라트로브 상공을 날며 인간의 존경과 신의 총애를 누렸다. 그리고 ‘킹’ 파머는 2016년 9월25일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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