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인터뷰] 우리가 몰랐던 스물여덟 고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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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인터뷰] 우리가 몰랐던 스물여덟 고진영
  • 서민교 기자
  • 승인 2023.11.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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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앵글을 따라 이토록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매력을 어떻게 감추고 지냈을까. 시크할 것만 같던 고진영 그리고 그의 눈은 세상 밖으로 처음 나온 소녀처럼 반짝였다. 음악과 함께 필드 밖 모습을 담은 어느 가을날, 그동안 나누지 못한 스물여덟 고진영을 담았다. 

“이번 촬영은 뮤직 콘셉트입니다. 어떤 음악을 틀까요?” 집에서 막 나온 듯 수수한 차림으로 강남의 한 스튜디오를 찾은 고진영은 ‘생얼’로 메이크업을 받으며 이렇게 외쳤다. “잘못된 만남!” 미국 진출 이후 한동안 곁을 떠나 있던 고진영과 한국에서의 첫 만남은 과거로의 여행처럼 구수하게 시작됐다. ‘잘못된 만남’은 즉흥적으로 나온 노래 제목이지만, 역설적이다. 이날 촬영에는 그의 오랜 스윙 코치인 이시우도 함께했다. 둘은 지난해 잠시 잘못된 만남을 가졌다가 재회했다. 인생은 깨달음의 연속이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싸워야 한다. 고진영이 그렇다. 마주하면 왠지 모르게 차분해지는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고진영의 골프 인생이 그려졌다. 

음악은 우리 인생에 늘 스며 있다. 일상으로 초대되기도 하고, 평소보다 더 간절할 때도 있다. 혼자 있을 때 옆에 두는 친구이기도 하다. “외로움이 익숙하다”는 고진영에게는 음악도 인생의 한 페이지같이 느껴졌다. 음악에 대한 그의 말을 옆에서 들어보자. “경기 전에는 음악을 안 들어요. 대신 경기 있는 날 아침에 일어나면 클래식이나 찬양곡을 듣죠. 샤워할 때까지요. 그러고는 기분에 따라 달라져요. 운전을 하거나 이동할 때는 신나는 재즈를 듣고요, 날이 좋은 날은 팝송을, 비 오는 촉촉한 날은 샹송을 틀어요. 지난해처럼 우울할 땐 권진아 노래를 듣기도 했고요.” 음악 취향만으로 그 사람을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유색이 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를 ‘웜톤’이라고 표현했다. 따뜻한 무언가가 있는 그의 스물여덟 이야기. 

GD 이렇게 시작해볼게요. 보통 마지막 질문으로 넣는데, 가장 먼저 묻고 싶어요. 고진영에게 골프란? 
KO 제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또 영향력 있는 매개체인 것 같아요. 제가 사람들에게 말로 하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골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향을 받고 또 그 영향으로 인해 좋은 에너지가 옮겨가며 나눌 수 있는 것이니까요. 

GD 지금은 고진영만의 골프가 아닌 게 됐네요. 어린 시절 골프를 처음 시작했을 때로 돌아가볼게요. 그때 골프와 지금의 골프가 달라졌죠? 
KO 그때 골프는 생존 골프였던 것 같아요. 조금씩 더 잘해서 유명한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마음보다 우승도 하고 유명해지는 거요. 그런 모습을 보면 좋아하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골프를 잘하는 선수, 막연한 성공 같은 거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조금은 내 위주로 골프를 하게 됐어요.  

GD 그렇다면 성공적인 코스를 밟았네요. 국가대표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거쳐 KLPGA투어와 LPGA투어까지. 그 순간마다 사색(?)을 즐기는 고진영에게 골프는 발전 단계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 같아요.  
KO 음… 국가대표 때 저는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때 골프가 굉장히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국가대표가 되기 전에는 생존 골프였다면 국가대표가 되고 나서는 골프에 대한 진심이 생겼다고 할까요? 김효주, 백규정, 김민선(김시원으로 개명) 등 다른 친구들이 워낙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으니까요. 저는 이 선수들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골프를 하면서 국가대표 시절을 보냈어요. 규정이, 민선이와 프로도 같이 올라왔어요. 규정이는 시드전 1위였고, 민선이는 워낙 거리가 많이 나는 선수였지만, 저는 그에 비해 뭔가 내세울 만한 장점이 딱히 없었어요. 

GD 그런 분위기에서라면 멘탈이 좋아지지 않았을까요?
KO (웃음) 멘탈이 좋게 느껴지는 건 아마추어 때 제 경기를 사람들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스무 살, 스물한 살 때 우승을 하면서 멘탈이 강한 선수라는 인식이 생긴 거니까요. 그 이후에도 박성현 언니와 전인지 언니의 라이벌 구도가 있었어요. 이렇게 지금까지 돌아보면 계속 저보다 잘하는 선수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는 실력조차 되지 않았는데 ,운 좋게 경쟁 구도에 제가 들어가게 됐어요. ‘이 정도면 됐다’ 안주할 수 있었던 저를 계속 채찍질하게 해준 건 저보다 잘하는 상대였고, 그들이 있었기에 계속 더 열심히 연습을 해야만 했던 거죠. 
 
GD 힘들기만 했을 것 같은 국가대표 시절이 왜 재밌었어요?
KO 국가대표 시절이 골프를 한 지 딱 10년쯤 됐을 때였거든요. 뭔가 조금 뚜렷한 목표가 생겼던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나가면 되겠구나’ 하는? 남자·여자 국가대표 선수들과 합숙하면서 배운 것도 많았고, 여러 골프장을 다니면서 다른 차원으로 골프가 한 단계 성장한 시간이었어요. 발전이라는 면에서 더 즐겁고 재밌었어요. 

GD 그거 알죠? 그런 엄청난 선수들을 다 이기고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는 거요. 163주. 역대 최장 기간 세계 랭킹 1위 기록입니다. 이토록 오래 그 자리를 지킬 거라 생각했나요? 
KO 유명한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세계 랭킹 1위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당연히 그렇게 오래 할 거란 생각도 못 했고요. 그냥 한 대회 한 대회 최선을 다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계속 경기를 하려고 노력했어요. 자만하지 않고 계속 제가 성장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생각했어요. 결과가 좋았고, 운도 좋았죠. 도움을 주신 분들이 정말 많아요. 혼자 힘으로는 절대 못했을 거예요. 

GD 명예와 함께 부담도 컸겠어요. 지키는 자의 부담이랄까? 
KO 힘든 때는 작년이었어요. 작년 하반기에 잠깐 이시우 코치에게 배우지 않으면서 스윙이 많이 흔들렸어요. 어쩌면 그때 코치님과 헤어지지 않았다면 세계 랭킹 1위 기간이 조금 더 이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다시 코치님과 함께하면서 코치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골프가 얼마만큼 예민한지 깨달으며 또 한 번 겸손해질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GD 스윙이 문제였나요? 아니면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KO 멘탈 문제였던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요. 그냥 뭔가 정신적으로 조금 흔들렸을 때 프로님께 지금처럼 의지했어야 하는데, 남에게 의지하는 것을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나 혼자 하겠다는 생각이 강했죠. 교만이고, 자만이었어요. 그러면서 또 한 번 배우는 계기가 되었지만요. 

GD 궁금해요. 이시우 코치의 최대 장점은 뭔가요? 
KO 저나 (김)주형처럼 정말 오래 함께한 선수들이 있어요. 물론 배우다 나가는 선수도 있죠. 장점은 어떤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저에 대해 정말 잘 아신다는 것. 코치님의 스윙 메커니즘과 제가 잘 맞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만요. 제가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코치님과 더 많은 우승도 하고, 많은 영광을 함께하고 싶어요.   

GD 사람 고진영에 대해 궁금한 게 참 많아요.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스스로 생각하는 고진영은 어떤 사람인가요? 
KO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람마다 저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이 많이 다르겠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커요. 정도 많고요. 그래서 한 번 제 사람이라 생각하면 엄청 퍼주고, 사랑도 많이 나누는 사람이거든요. 제 자랑 같기도 하지만, 그래요. 

GD 그런데 그런 모습이 잘 안 보이긴 했어요. 제가 보는 고진영은 이래요. 승부욕이 강하다, 독종이다, 시크하다, 차분하다, 사려 깊다…. 이 중에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가요? 
KO 음… 승부욕? 강한 것 같아요, 진짜 강해요. 독종? 맞고요. 제가 하는 일에 있어서는 제가 정한 나만의 기준이 있어요. 그래서 뭔가 아닌 것 같다 싶으면 끝까지 아니라고 하는 성격이죠. 고집이 세다는 말도 많이 들어요. 차분하고 생각이 많은 편이긴 해요. 거의 다 맞네요. 시크한 건 잘 모르겠지만(웃음). 

GD 투어에서의 고진영과 평소의 고진영은 다른가요? 
KO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을 때는 진짜 밝고 활발하고 외향적이었어요. 그런데 우승도 많이 하고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조금씩 내성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식당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기도 하거든요. 그런 게 싫을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모자를 쓰고 다니기 시작했죠. 게다가 워낙 잘 꾸미지 않아서 생얼로 백화점이든 식당이든 잘 다녀요(웃음). 쿨하고 시원시원한 성격도 있고요.  

GD 눈물이 많나요? 웃음이 많나요? 
KO 둘 다요. 장난기도 엄청 많아서 남 놀리는 거 재밌어하고 웃음도 많아요. 그런데 또 눈물도 많아요. 슬픈 거 보면 많이 울고, 그냥 얘기하다가 울기도 하고 그래요. 

GD MBTI를 안 물어볼 수가 없겠는데요? 
KO ENFJ와 ESFJ를 왔다 갔다 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회 중에는 I로 바뀌더라고요. 대회 때 제가 느끼기에도 성격이 바뀌는 것 같아서 그 기간에 한 번 더 해봤더니 I로 나왔어요. 신기하죠. 

GD 좋아하는 색깔은요? 
KO 웜톤 계열의 조금 차분한 컬러를 좋아해요. 베이지나 브라운 같은? 버건디도 좋아요. 

GD 이 계절, 가을과 맞네요. 혹시 좋아하는 계절도? 
KO 가을과 겨울을 좋아해요. 차분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봐요. 

GD 경기를 할 때 주로 어떤 생각을 해서 I로 바뀌는 거죠? 예전에는 샷을 상상하며 볼이 날아가는 그림을 그려본다고 했던 기억이 있긴 해요. 
KO 대회를 준비하는 월·화·수요일에는 굉장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요. 이 스트레스 때문에 골프를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준비를 할 때 제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는 거죠. 그만하고 싶다가도 또 막상 대회에 들어가면 잘하고 싶은 본능이 나와요. 여러 생각이 들다가도 이 아까운 나이에 서울에서 친구들과 먹고 놀고 해야 할 때 나는 그러지 못하고 그 시간을 대회에 투자하고 있으니까요. ‘이 시간이 후회되지 않게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가자’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아요. 

GD 페어웨이를 걸을 때는요? 
KO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해요. 강아지 생각도 하고, 성경 말씀이나 찬양을 떠올리기도 하고, 데이브(그의 캐디인 데이브 브루커는 로레나 오초아의 골프백을 들기도 했다)와 얘기도 하고요. 

GD 요즘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요? 세월에 따라 그때그때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관심사는 계속 달라지잖아요. 
KO 제가 좋아하는 언니와 얘기를 하다가 은퇴에 대한 얘기가 나왔어요. 그 언니도 몇 년 전부터 은퇴 생각을 했었대요. 그런데 은퇴라는 이미지가 머리에 안 그려진다는 거예요. 그 언니를 공개할 순 없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어요. 저도 한번 생각을 해봤어요. 골프를 안 하고 은퇴를 한다면? 뭘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더라고요. 상상조차요. 그래서 알았죠. 나는 아직 은퇴가 멀었구나. 골프를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 지수를 낮추면서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렇게 대회가 없는 기간에는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생각들을 해요. 
KO 아, 제가 완전 J거든요. 한국에 가면 무엇을 하고 어디를 가야겠다는 것을 몇 주 전부터 아주 철저하게 스케줄러에 다 정리해놔요. 운동 스케줄도 다 잡아놓고요. 심지어 부모님과 식사를 어디서 할 건지 아주 디테일하게 스케줄을 짜요. 예약도 다 해놓고요(웃음). 지금은 아직 시즌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우승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스윙을 만들어야 내가 고민하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GD 뒤에 하려고 했던 이 질문을 먼저 해야겠네요. 고진영의 은퇴는 왠지 안 그려져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질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KO 클럽을 딱 던지고 사라질 것 같은 거, 맞아요(웃음)! 저는 언제가 은퇴 경기다, 이렇게는 안 할 것 같아요. 골프를 하면서 감사한 부분이 정말 많고 제가 배운 것들을 나눠야 하는 시간이 올 수도 있겠지만, 홀연히 사라지는 게 어떻게 보면 제 성향에 제일 잘 맞을 것 같기도 해요.  

GD 어느 순간이 오면 그만두겠다는 기준이 있어요? 
KO 제가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최대한 성적은 포함시키지 않은 채로요. 우승은 물론 중요하지만, 저에게는 엄청 중요한 가치는 아니거든요. 아직은 최선이 아니라 생각해요. 

GD 최선을 다하지 말고 적당히 하길 기대할게요(웃음). 대회를 앞두고 반복되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겨내고 있어요? 
KO 아니요, 그건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닌 걸 알았어요. 제가 골프를 직업으로 갖고 투어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은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야죠. 사람의 감정도 계속 바뀌고 움직이잖아요. ‘오늘 또 우울하구나. 내일은 또 어떨까’ 이러면서 그저 초연하게 넘기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GD 그럼 요즘 낙은 뭐예요? 
KO 요즘 낙은 퍼팅이요. 퍼팅 연습하는 게 재밌어요. 

GD 퍼팅이요? 아직도 골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가 봐요. 
KO 제가 퍼터를 바꿨거든요. 그동안 사용했던 퍼터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기회가 있어서 퍼터 스타일을 완전히 바꿨어요. 말렛 퍼터를 쓰다가 블레이드 타입을 다시 사용하는 건 스물세 살 이후 처음이에요. 10월 초 홍콩 대회 때 처음 들고 나갔어요. 아직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그 시간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스탬프도 새로 새기고, 생갬새도 정말 예쁘거든요. 말렛보다는 블레이드가 예민하잖아요. 제가 잘 치고 못 쳤을 때 느낌이 달라요. 대회에서 말렛을 사용해 볼이 안 들어갔을 때 이유를 몰랐거든요. 블레이드는 볼이 홀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제가 알아요. 그런 피드백을 바로 느끼니까 더 재밌더라고요. 

GD 사실 제가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어요(웃음). 골프 외적으로 요즘 낙은 뭐예요? 
KO 아…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요. 이번 홍콩 대회 때 정말 오랜만에 엄마와 둘이 갔거든요. 이렇게 둘이 간 건 중학생 때 이후 처음이었나 봐요. 일주일 내내 엄마와 같은 방에서 지내면서 함께 다녔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20대 초반에는 사춘기처럼 뭔가 불만도 많고 부모님이 원하는 삶대로 살아야 하는 것도 너무 스트레스였거든요. 서른을 앞둔 20대 후반이 되면서 조금은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됐고, 엄마도 딸 고진영이 아닌 그냥 스물여덟 여자 고진영으로 이해해주시는 것 같아요. 대화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예전보다 대화가 더 잘 통하더라고요. 맛있는 것도 먹고, 쇼핑도 같이 하고요(웃음). 

GD 미국 진출 이후 국내외를 오가며 이동 시간도 많잖아요. 그때 어떻게 시간을 보내요? 
KO 대회 끝나고 다른 대회장으로 이동할 때는 거의 비행기를 이용해서 그냥 눈 붙이고 잠자기 바빠요. 미국 텍사스 집에 들러 잠깐 쉴 때는 이것저것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시간이 짧아요. 밀린 집 청소에 장 봐서 요리도 해 먹고, 틈틈이 연습도 해야 하니까요. 또 짐도 풀었다가 다시 싸는 게 일이에요. 집에 있을 때 오히려 굉장히 정신이 없죠. 

GD 요리하는 고진영이 낯선데요? 주로 어떤 음식을 해요? 
KO 한식이요. 최근에는 커피 넣고 돼지고기를 삶은 수육과 겉절이를 곁들여 보쌈을 만들어 먹었어요. 콩나물국을 끓여먹기도 하고요. 

GD 주로 미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이 더 커졌을 것 같아요. 
KO
외로움은 장소에 상관없이 시시때때로 느끼는 것 같아요. 사람이 옆에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잖아요? 미국에 가서 외로움이 더 커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원래 외동으로 자라서 외로운 건 익숙하거든요. 

GD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죠?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 오히려 편안해 보인달까요?  
KO
제가 원래 혼자 생각하고 사색에 빠지는 걸 좋아해요(웃음).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어릴 때부터 혼자 생각하고 놀아도 괜찮았거든요. 그런데 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가 더 재미있긴 하더라고요. 이젠 옆에 함께하는 사람이 많을 때가 더 좋아요. 밥도 다 같이 먹고, 차도 함께 마시면서 얘기할 때가 더 재밌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곁에 사람을 더 두려고 해요. 

GD 이 타이밍에 슬쩍 남자 친구 얘기를 해볼까요? 
KO
네(웃음)? 제 직업 특성상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잖아요. 그런 부분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제가 미국에 가더라도 저를 많이 응원해주고, 제가 미안해하지 않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려고 해요. 

GD 더 구체적으로 어떤 남자를 곁에 두고 싶어요? 
KO
지금 저도 제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기 개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어른한테 정말 잘했으면 좋겠고요. 예의 바르고 지혜로운 사람. 이왕이면 잘생기면 좋겠고요(웃음). 유머 코드도 잘 맞았으면 해요. 같은 걸 봐도 다를 수 있잖아요? 웃는 포인트가 비슷하면 좋겠어요. 그래야 싸우더라도 얼굴 한번 보면 풀리고, 에너지 소모도 덜하죠. 

GD 꼭 그런 사람을 만나길 응원할게요. 치열하게 달려온 골프 인생이라면 지금이 또 한 번의 전환점이지 않을까요? 
KO
글쎄요. 진짜 치열하게 달려왔는데, 사실 지금도 치열해요. 그래서 이렇게 조금 쉬어 가는 시간을 제 스스로에게 주고 있는 것 같아요. 너무 지쳐 있었거든요. 항상 시즌 초반에 에너지가 넘쳐서 달리다가 중간에 한 번 너무 지쳐서 에너지가 떨어지는 시간이 있더라고요. 매년 계속 이런 식이어서 어떻게 에너지를 잘 나눌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해요. 

GD 특히 올해부터 뭔가 여유로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KO
예전에 비하면 지금 그렇게 보이거나 느낄 수 있지만, 저는 여유를 안 가지려고 해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이 더 남아 있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여유’라는 단어는 안 쓰려고 해요. 어떻게 보면 안주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도 우승을 위해서는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지만, 골프 자체만 놓고 보면 이제 생존 골프를 하고 있지는 않아요. 골프를 하는 순간순간의 상황과 감정을 조금은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긴 해요. 예전에는 ‘무조건 이겨야 돼’라는 결과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과정을 더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죠. 

GD 과거의 고진영, 현재의 고진영, 미래의 고진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먼저 과거의 고진영에게. 
KO
나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다. 10~20대 시절을 지나면서 그 나이에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포기하면서 골프에 모든 걸 쏟아부어서 조금 안쓰럽다. 

GD 현재의 고진영에게. 
KO
과거의 나보다는 조금 나아졌구나. 부모님도 어느 정도 나를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해주시고. 연습을 하지 않겠다고 해도 별말 없이 지켜봐주시고. 그렇지만 여전히 나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있구나. 이 성향은 과거나 현재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GD 현재도 고진영은 골프를 위해 많은 걸 포기하고 있는 거네요?  
KO
그렇죠. 과거에 비해서는 그래도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면서 ‘워라밸’을 맞춰가고 있긴 해요. 

GD 마지막으로 미래의 고진영에게는? 
KO
미래의 시점이 아직 현역일 수도 있고 은퇴 후일 수도 있는데, 진짜 후회 없이 살았으니 앞으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라. 과거도, 현재도 최선을 다했으니 미래에도 최선을 다해라. 

GD 은퇴를 한다면 뭘 하고 싶어요? 
KO
저는 누구를 가르치는 일은 부담이 매우 커요. 제가 저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게 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다른 선수나 후배에게 가르친다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서로 관계가 계속 틀어질 것 같아 걱정돼요. 못 가르치겠죠(웃음)? 그동안 못한 공부를 하면서 여자 골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GD 지금 한국 여자 골프 혹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한다면요.  
KO
일단 골프를 오래 하고 싶으면 최대한 부상에서 멀어지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너무 골프만 하면서 운동과 라이프 밸런스가 안 맞으면 한쪽이 다칠 수 있거든요. 아프다는 생각이 들면 당장 눈앞의 대회를 포기하더라도 더 길고 멀리 보고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실행력이 있었으면 해요. 

GD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골프 인생을 헤쳐나가야 할까요? 
KO
진짜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죠. 그렇지만 오직 골프 하나만 바라보지 말고 주변을 잘 살폈으면 해요. 골프가 중요하지만 삶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골프를 중심으로 주변 여러 방면도 조금씩 공부하면서 준비를 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지금껏 쌓아온 소중한 시간을 활용하면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한 게 아쉽거든요. 이를테면 영양 관련 책을 읽어도 더 깊게 파고들어 영양학 전문 서적을 읽었다면 음식을 하나 먹더라도 어디에 왜 좋은지 이해하고, 골프에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언젠가 다큐멘터리를 보고 한 달 정도 비건을 한 적이 있는데, 경기 전에 너무 배고파서 그만뒀어요(웃음). 

GD 아직은 입성하지 못했지만, 명예의 전당 헌액을 눈앞에 뒀어요. 
KO
크게 의미를 두진 않고 꿈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어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든 못 들어가든 지금까지 제가 해온 커리어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고진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살아가다 보니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제가 살아온 골프 인생을 알아봐주시는 거니
까요.  

[사진=윤석우(49비주얼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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