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은 가장 위대한 예술가다. 바람과 하늘 그리고 파도가 내는 소리는 그 어떤 음률보다 아름답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 즉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경험할 수 있는 골프 코스가 그리 멀지 않은 베트남에 있다. 프로 골퍼 출신 기자의 눈으로 본 더 블러프스, 그리고 코스 설계가가 바라본 더 블러프스의 진솔한 소회를 들어보자.
지구 생명체와 골프 코스의 공통점은 바다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초기 골프 코스는 골퍼들이 링크스 지형이라고 부르는 삼각주와 해안의 모래언덕에 뿌리를 내렸으며, 오래도록 해안가에 머물다가 내륙으로 이동했다. 인구가 밀집한 지역으로 골프가 더 가까이 다가갈 때도 종이에 골프 코스를 그리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모래 토양을 찾아다녔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모래에서 자라는 잔디는 탄성이 있어 볼이 잘 튀며, 배수성이 좋아 비가 많이 온 다음에도 물이 금세 빠진다.
모래가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바람이 불고, 모래 지형에 부는 바람은 자연스럽게 구덩이를 파서 벙커를 만든다. 이처럼 바람은 골프 게임의 본질적 요소다. 바람이 전혀 없다면 골프는 방구석의 다트 게임과 다를 게 없다. 초기의 위대한 코스는 해안선을 따라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영국 작가 버나드 다윈(Bernard Darwin)은 ‘완벽한 골프의 땅’을 일컬어 “왼쪽으로는 모래언덕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물결치고, 오른쪽으로는 광활한 덤불이 펼쳐진 곳”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자연은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준다. 인간은 자연의 품에 안길 때 비로소 안식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인간의 마음은 가장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점차 골프가 대중화될수록 골프 코스는 자연을 조금씩 내려놓게 된다.
불도저의 등장으로 골프 코스 건설에 속도를 낼 수 있었지만, 자연적 선형을 유지하기보다 직선과 직각으로 이뤄진 페어웨이를 넣은 대칭의 홀들로 정형화된 코스를 만들어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지형은 흙을 퍼내고 지면을 깎아냈으며,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의 천편일률적인 레이아웃을 지닌 코스들이 등장했다. 골프 코스 옆 풍경은 해안가 대신 주택단지로 바뀌었다. 어느새 골퍼들은 자연의 위대함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기술의 발전이 골프 코스에 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TV 중계, 이후에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골퍼들은 책상과 소파에 앉아 위대한 해안가 코스를 간접 체험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골프 본연의 모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새로운 세대의 코스 디자이너들도 등장했다. 코스 디자이너들은 전 세계의 해변을 뒤지며 골프 코스 부지를 물색했고, 해안선이 3000km에 달하는 베트남의 매혹적인 모습에 반했다.
이후 그렉노먼골프코스디자인과 팔도디자인, 니클라우스디자인 등 프로 골퍼 출신 설계가들과 리 슈미트, 브라이언 컬리,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 등 내로라하는 코스 디자이너들이 베트남의 해안선을 따라 창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결국 골프는 모래언덕이 발휘하는 영향력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는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한 것이다.

◆순수주의자를 위하여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남동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호짬(Ho Tram). 이곳에 위치한 더 블러프스 그랜드 호짬(이하 더 블러프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모래 고원 위에 얹혀 있는 정통 링크스 코스다. 베트남 관광 홍보대사이기도 한 그렉 노먼이 베트남에서 두 번째로 디자인한 이 코스는 2014년에 문을 열었으며,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세계 100대 코스에 들었다.
세계 100대 코스의 상징성은 크다. 코스가 위험과 보상을 포함한 다양한 옵션을 얼마나 잘 제시하고 다양한 샷을 요구하는지를 묻는 ‘샷 옵션’, 그리고 홀의 모양과 형태, 파의 균형, 페널티 구역의 배치, 경사면의 사용, 즉 라우팅을 판단하는 ‘설계의 다양성’ 등 여러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더 블러프스 코스를 설계한 노먼은 “베트남 남부의 모래언덕에서 진정한 링크스 골프를 즐기고 라운드 내내 극적인 바다 전망을 감상하는 경험은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골프 경험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더 블러프스는 파71과 7007야드의 전장을 가지고 있으며, 5개의 파3 홀과 4개의 파5 홀 그리고 9개의 파4 홀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인 골프장에 비해 파3 홀이 하나 더 많고 파4 홀이 하나 적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4번홀부터 7번홀까지의 파 로테이션(Par Rotation)이다. 4번홀과 7번홀은 파3 홀이며, 그 사이의 5번홀과 6번홀은 연속적인 파5 홀이다. 국내 골프장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파3, 파5, 파5, 파3의 구성이었다. 나는 이렇게 특별한 파 로테이션을 확인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이런 파 로테이션을 두고 있다면 루팅 플랜(Routing Plan)을 만들 때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홀을 구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황홀경의 시작
세계 100대 골프장에 가볼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구력 25년이 넘는 프로 골퍼인 나조차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세계 100대 골프장을 경험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더 블러프스는 한국 골퍼들이 세계적 수준의 링크스 코스를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골프장 중 하나다.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링크스 코스는 인공적인 모래언덕을 조성한 곳이 많고, 세계 100대 골프장에 선정된 다른 골프장들은 프라이빗 회원제 코스이거나 한국에서 이동 거리가 먼 곳에 있는 골프장이 많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며 더 블러프스 클럽하우스에 들어서자 설계가 그렉 노먼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남자 라커 룸에는 노먼이 사용하던 골프백과 클럽이 전시되어 있다. 클럽하우스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골프웨어와 모자·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숍이 마련되어 있으며, 숍을 나서면 모래언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페어웨이를 거침없이 침범한 모래언덕과 듬성듬성 자란 관목들 덕분에 마치 잔디보다 모래가 더 많은 것 같은 느낌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코스의 언듈레이션이 심했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답고 독특한 매력이 전해진다.
클럽하우스는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코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카트 길은 티잉 구역 근처 또는 필요한 곳에만 깔려 있다. 그 덕분에 코스 가장자리에 인공적 구조물이 보이지 않아 자연스러운 선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코스가 자연적 지형 위에 그대로 얹힌 코스임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소다. 자연스러운 코스의 선형은 모래언덕과 조화를 이루어 특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꽤 강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바람이 부는 강도와 방향이 일정하다는 것.
◆오프닝
1번홀의 형상은 마치 세인트앤드루스의 오프닝 홀과 비슷하다. 1번홀과 9번홀이 페어웨이를 공유하는 파4 홀이다. 먼 길을 온 손님을 맞이하는 듯 드넓은 페어웨이는 그린까지 직선으로 쭉 뻗어 있다. 그린까지의 접근 방법이 간단해 보이지만, 오르막에 위치한 그린을 공략하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그린 왼쪽에 위치한 벙커가 골퍼의 실수를 기다리고 있기에 방심은 금물이다.
1번홀을 지나면 곧바로 긴장감을 높이는 내리막 파3 홀이 나온다. 그린은 요새처럼 보호되어 있다. 그린 왼쪽은 숲, 정면에는 벙커가 자리 잡았다. 그린 뒤편에는 숨겨진 또 다른 벙커가 있고, 그린 우측은 푹 꺼져 있다. 오른쪽으로 그린을 놓쳐버린다면 볼은 내리막 경사를 타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 어프로치 샷이 쉽지 않다. 그리 길지 않지만 잔인한 파3 홀이다. 미스 샷을 하면 어김없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5번홀은 연속적인 파5 홀 중 첫 번째 홀이다. 티 샷부터 마무리 퍼트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핸디캡 1번 홀이다. 일단 티 샷을 페어웨이 우측으로 보내야 한다. 티 샷이 왼쪽으로 가면 최악의 상황을 마주한다. 모래언덕으로 볼이 향하면 푹신한 모래가 볼을 집어삼킨다. 페어웨이에서 살짝 벗어났을 뿐인데 볼을 찾기 쉽지 않다. 두 번째 샷은 거리보다 방향성에 자신 있는 클럽으로 공략해야 한다. 잘록한 페어웨이에 볼을 안착하지 못하면 버디 기회는 날아간다.
전반전을 마무리하는 9번홀(파4)도 인상적이다. 세인트앤드루스의 18번홀과 마찬가지로 1번홀과 페어웨이를 공유하기 때문에 페어웨이 좌측의 여유 공간이 충분하다. 하지만 두 번째 샷 공략이 문제다. 그린 오른쪽 하단에 있는 커다란 벙커들이 위협적이다. 벙커가 워낙 깊어 이곳에 볼이 들어가면 핀이 보이지 않는다. 이 벙커에 들어갔다면 상상 속의 핀 위치를 그리며 허공으로 볼을 퍼 올릴 각오를 해야 한다.
◆끝나지 않는 긴장감
10번홀(파5)에 들어서자 마치 활주로를 연상시키는, 쭉 뻗은 티잉 구역이 보인다. 티잉 구역의 길이가 70야드는 족히 넘는 듯하다. 길게 뻗은 티잉 구역 덕분인지 티 샷의 에임은 편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난관은 두 번째 샷이다. 그린 입구는 병목처럼 길고 좁다. 두 번째 샷의 방향이 흔들린다면 십중팔구 볼을 잃어버린다. 두 번째 샷을 페어웨이 위에 올려놔도 집중력을 이어가야 한다. 그린은 앞뒤로 길게 만들어졌으며, 그린 왼쪽에는 깊은 벙커가, 오른쪽에는 모래언덕이 있기에 세 번째 샷을 할 때 바람의 방향에 따른 의도적 오조준은 필수다.
바다에서 불어온 강한 바람이 무더위를 식혀줘 고맙게만 느껴지고 모래언덕을 이리저리 피해가는 재미를 알아갈 때쯤 마주한 13번홀은 386야드의 그리 길지 않은 파4홀이지만, 페어웨이 왼쪽을 절반 이상 침범한 높은 모래언덕이 자리 잡고 있어 티 샷부터 압도되는 느낌이다. 혹시라도 드라이버 샷이 왼쪽의 모래언덕 방향으로 향한다면 참회하는 마음으로 세 번째 샷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명당을 찾아 볼을 보내야 한다. 티 샷을 성공적으로 했더라도 그린 앞에 위치한 나무가 길목을 막아선다. 창의력을 발휘해 공략적인 샷 선택이 필요한 홀이다.
15번홀은 더 블러프스에서 가장 긴 오르막 파3 홀(257야드)이다. 티잉 구역부터 그린 왼쪽까지 황무지가 이어져 있는 까다로운 홀이며, 이 홀에서 파를 기록했다면 버디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스스로 칭찬해도 될 정도로 난도가 높은 홀이다. 이어지는 16번홀 역시 가장 긴 파5 홀(651야드)이다. 그러나 티 샷부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홀은 완만한 내리막을 이루고 있으며, 페어웨이도 넓은 편이다. 다만 두 번째 샷에서는 페어웨이 왼쪽의 높은 모래언덕을 피해가야 하며, 세 번째 샷에서도 그린 왼쪽의 커다란 벙커를 조심해야 한다.
마지막 홀인 18번홀도 이 코스에서 가장 긴 파4 홀(489야드)이다. 게다가 그린까지 오르막길이라 체감 거리는 더욱 길다. 티 샷은 페어웨이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모래언덕의 오른쪽 끝을 노려야 한다. 두 번째 샷도 그린 오른쪽을 겨냥하는 것이 좋다. 그린 오른편에 높은 경사면이 있어 볼이 예상보다 더 오른쪽으로 향하더라도 그린에 굴러 올라갈 확률이 높아진다.

◆중독의 모래언덕
1번홀부터 18번홀까지 단 한 홀도 긴장감을 놓지 못하는 역동적인 라운드가 끝났다. 세계 100대 코스에서 라운드할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에 코스를 최대한 세세하게 둘러보려 노력했고, 강한 바람을 맞으며 라운드하다 보니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서둘러 클럽하우스 레스토랑에서 망고 주스와 쌀국수를 주문했다.
고개를 드니 클럽하우스 레스토랑 창밖으로 코스와 호텔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나는 쌀국수를 게걸스럽게 먹으면서도 창밖의 코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스마트폰에 중독된 사람이 식사를 하면서도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더 블러프스의 모래언덕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 코스에 중독되어 있었다.
◎더 블러프스 그랜드 호짬
THE BLUFFS GRAND Ho tram
Phuoc Thuan, Xuyen Moc District,
Ba Ria - Vung Tau Province, Vietnam
+84 254 378 8666
info@thebluffshotram.com
사진_윤석우, 남건욱(49비주얼 스튜디오)